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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버리기
골목을 다니다 보면 그곳에 사는 주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중 마을에 대한 자존감을 갖고 있는 경우는 열 사람 중 한 두 사람정도입니다. 대부분 이렇게들 말합니다.
“이제 누가 여기 들어와 살아. 나 같은 늙은이들이나 떠나지 못하고 여기서 살지 젊은 사람들이 여기에 들어와 살려고 하겠어? 옛날에는 아이들 노는 소리가 그렇게 시끄러워서 못산다고 했는데, 그 아이들이 다 떠나고 이렇게 조용해 졌어. 애들이 하나도 없어. 늙은이들만 남아 있지. 이런 집들 그냥 허물고 아파트나 번듯하게 짓고 살았으면 좋지. 조합 만들어 재개발한다고 하더니 경기가 죽어 잘 안되는가 봐. 집도 못 고치고 그냥 미치겠어.”
그냥 조용히 얘기만 듣고 물러나옵니다. 지금 저도 아파트에 살고 있으면서 이 분들한테 “이 곳이 소중한 곳이니 재개발 보다는 그냥 가꾸며 사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는 것이 좀 그래서 그냥 듣기만 합니다.
15~16년 전 달동네에 살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집이 하도 낡아 장마철에는 방바닥으로 물이 차서 장판을 뜯어내고 주사기로 물을 빼낸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파가 와서 수도가 얼어 보일러도 가동 못하고 그냥 추위에 떨며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아이들만 외가에 보내고 부부는 그렇게 열흘을 살았습니다. 모든 집들 사정이 다 그러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이런 열악한 주거환경 때문에 바로 아랫집 할머니는 겨울만 되면 그냥 큰 아들이 사는 아파트로 가서 겨울을 나고 봄철에 돌아옵니다. 돌아오셔서 하시는 말은 이렇습니다.
“큰 아들이 사는 아파트가 편하긴정말 편해. 따스한 물 나오지, 찬바람도 없어 따뜻하게 보내지, 너무 편해. 그런데 나 같은 노인한테는 겨울 한 철만 좋지. 너무 외로워. 사람이 없어. 아들은 일하러 가지, 나이 먹은 며느리도 집에만 있으면 시어머니하고 뭘 할 게 있어. 집안 청소, 빨래하고는 점심 챙겨 주고 나가. 그러면 나 혼자지. 아이들도 집에 있다고 하지만 방구석에서 나오지를 않아. 나 혼자 눈만 말똥거리고 있다가 노인정에 가도 별 할 일도 없고 그래. 재미가 없어. 그래도 이 동네는 살기는 불편해도 사람들이 있잖아. 여기 오니까 숨통이 트여. 사람 사는 것 같애.”
지금은 그 할머니 집도, 우리 집도 대단위 아파트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할머니는 혼자 아파트에 삽니다. 저녁때만 되면 아파트 단지 정문에 나와 야쿠르트 아주머니와 애기를 나눕니다. 지나가다 인사를 하면 대뜸 이런 말을 하십니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다가 저녁이 돼야 이 아줌마랑 얘기하는 재미로 그냥 나와 있어. 아파트 살면 모든 게 다 좋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네. 나 같은 노인은 답답해 죽겠어. 편하기야 편한데 사람이 없어 외로워. 하도 답답해서 저녁 일찍 해 먹고 이렇게 나와 있어. 그러면 속이 확 뚫려. 사람은 사람을 만나고 살아야지 혼자 살면 사람 버려.”
우리는 왜 있는 사람을 품는 마을을 버리고, 사람을 버리는 마을을 새로 만들려고 할까? 하는 의문을 던져봅니다.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의 등장인물들이 들어갔던 여관, 벽으로 나누어진 방. 인간 소통 단절과 소외를 의미했던 그 여관이 이제는 우리 일상 주거생활까지 파고들어 벽으로 나누어진 집 – 그리고 마을 – 도시로 전이되어 사람을 품는 집/마을/도시에서 사람을 버리는 집/마을/도시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집’을 ‘사람이 살기 편한 집’으로 만들면 그것이 결국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이 되고, 그런 마을이 모여 사람을 위한 도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집을 만드는 주체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이고, 그런 마을을 만드는 주체도 마을사람이며, 그런 도시를 만드는 사람 역시 그 도시에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기초로 하지 않지 않은 집/마을/도시는 “벽으로 나누어진 방”으로, 의사소통의 단절과 인간 소외를 낳는 곳에 불과합니다. 그 집에 사는 사람, 그 마을에 사는 사람, 그 도시에 사는 사람이 만드는 그런 곳에 살기를 바랍니다.
이성진 I 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