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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살기
강(마을사진관 다행)
부평에서 배다리 ‘다행’까지의 출근길은 어떤 전동차가 오느냐에 따라 약간 달라진다. 완행이 오면 도원역에 내려 창영동으로 내려오는 철로변길이 오가는 길이 되고, 급행이 오면 동인천역에서 내려 참외전로를 따라 배다리로 올라오게 된다. 그 짧은 길 옆 철로 주변에 정말 많은 집이 있었다고 한다.
동인천에서 배다리 철길까지는 주로 청과물시장이 형성되었던 것 같다. 가게들이 이어지다가 뚝 끊어지는 부분부터 건너편엔 아름드리 나무가 주욱 늘어서서 배다리 철로까지 이어진다. 종묘가게 옆으로는 낡고 오래된 판자촌이 있는데 ‘쪽방상담소’라는 간판으로 보아 예전부터 어려운 형편의 주민들이 살았던 공간인 듯 했다. 예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고 했다.
여름이면 그 짧은 길은 아름드리 나무가 펼쳐주는 그늘 아래 햇볕이 보이지 않았고, 빗방울도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가지가 하늘을 가리고 있다. 지난 가을에는 그 나무아래 붉은 국화가 예쁘게 심어져 있어 좋았다. 때론 굳이 그 짧은 길을 가려고 동인천역을 선택하기도 한다.
오늘, 나비가 서울 가는 길을 배웅하고 다녀오는데 철판으로 가려진 그 곳에 트럭 머리가 나와 있었다. 트럭에는 나무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곳에 있던 집들을 뜯어낸 흔적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 크고 아름답던 아름드리나무가 잘리고, 뽑혀지던 날이 떠올랐다. 더 이전에 중구가 설치한 사진이 붙어있는 나무 벽이 갑자기 설치되던 일도 기억이 났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판자촌, 쪽방촌, 달동네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시도한 폭력들을 생각한다면 나무를 심어 가리고자 했던 어떤 공무원의 방법은 고맙다는 생각까지 들었었는데, 그 나무의 굵은 가지가 낱낱이 잘리고 뿌리째 뽑히던 날 얼마나 화가 나던지 눈물이 많이 났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철벽이 세워졌다. 이것들이 또 무슨 짓을 하는가 싶어 사진을 찍어뒀다.
그리고 오늘, 그 벽 뒤에 집들이 헐리고 있었다. 길옆으로 있던 집은 몇 채 되지 않았다. 이 집들이 헐리니 그 뒤로 생각보다 많은 창문들이, 집들이 있었다. 내심 ‘아, 몇 채 되지 않는데 쪽방촌이라고까지 하지는 않았겠구나!’ 싶었다. 지친 어깨를 기댔을 판자벽이 헐리니 고작 트럭 몇 대에 다 들어갔다. 트럭에 켜켜이 쌓인 나무판자들을 보며 ‘저 벽에 기대어 살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저 집들이 저 나무판으로 쌓아올린 그야말로 판잣집이었구나!’, ‘삶이 힘들었겠다. 어디 좋은 곳으로 옮겨 가셨으면 좋겠다.’ 등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은 지금 부개주공이 있는 그곳이다. 인천시 북구 부개동 어쩌고 하던 동네다. 잘 없어지지 않는다던 도로마저 지금은 다 갈아엎어 그 흔적조차 없다. 그리고 주로 오가던 동네가 송월동, 송림동 8번지 철탑 아래 어디. 그리고 지금은 배다리다. 그래서 그런지 사라져 가는 것들이 때때로 애달프다. 아프고, 슬프고, 아련하다. 누군가의 삶이 나아지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삶을 밀쳐내고 들어선 아파트, 아파트……
이제는 그렇게 만들어낸 아파트조차 옛날 저층 아파트를 밀어내고 고층 아파트를 짓고 또 짓는다. 경제성장의 열매로 개발이 위력을 발휘하던 때는 지났는데 토건의 열매를 맛보았던 이들이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파헤친 결과다. 더 이상 그 아파트에 들어갈 사람조차 없다. 드디어는 미분양 사태가 계속되고, 분양받은 아파트조차 대출이자를 갚느라 비싼 월세를 내며 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아파트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빌라라는 다세대 주택에 산다. 그 조차도 전세는 거의 다 사라지고 월세다. 주거공간이 안정되지 못하니 삶은 더 팍팍해진다.
기업은 국가의 경제성장과 국민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막대한 지원과 혜택을 받고도 그 열매를 나누지 않고 아귀처럼 골목골목 상권까지 먹어치우며 썩어가고 있고, 불안한 고용으로 인해 사람들은 더 이상 줄일 허리띠 구멍이 없는 상태다. 그런 기업을 견제하고 감시하고 국민의 이익을 위해 애써야 할 정치인은 자기 돈과 권력만 챙기느라 끊임없이 타락하는 추접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나라는 더 이상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지 않고 ‘알아서 살라’며 내팽개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는 시대다. 어느 시인은 “풀은 가장 먼저 누웠지만 가장 먼저 일어선다”고 말했다. 숨이 붙어 있으니 살아야 하고, ‘혼자가 아닌 함께’여야 한다는 것이 화두가 된지 십 수 년이다. 개발을 위해 해체한 마을을 다시 복원하고, 안전한 마을을 위해 이웃과 만나야 하고, 비싼 집값 때문에라도 가족은 다시 한 지붕아래 만나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언제든 세월호의 그 아이들이 내 아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씨월드 어린 아이들이 내 손자일 수 있다는 사실도, 어린이집 원장에게 맞아 죽은 그 아기가 내 아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동체(운명이나 생활, 목적 등을 같이하는 두 사람 이상의 조직체)가 화두가 된 것 역시 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겹겹이 쌓인 실제의 벽을 치우고, 마음의 벽을 걷는 일이 쉽지 않다. 수십 년 동안 해체되어 온 것을 다시 회복하는 일은 지금 내가 너에게 ‘별 일 없는지’ 묻는 것, 손을 먼저 내밀고 그 내민 손을 잡는 것, 휘청이는 어깨를 기대도록 하는 것, 길가의 쓰레기를 함께 줍고, 넘어진 이를 함께 일으켜 주는 것, 가만히 귀 기울여 듣는 것… 참 사소한 것들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몸과 마음의 벽을 스스로 지우는 일은 TV나 인터넷이나 핸드폰이 아니라 내 앞에 사람들의 눈을 바라보고, 목소리를 듣고, 얼굴빛을 살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집안에서, 차안에서 벗어나 길을 걷고, 바라보는 일이다. 냉장고에 음식을 쌓아 둘 것이 아니라 음식을 만들어서 이웃과 나누는 일이다. 좁은 집에 온갖 몇 개의 다리미, 몇 개의 냉장고, 몇 개의 솥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들을 얼마나 쓰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적게 소비하고 함께 나누고, 그러기 위해서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어울려 살아가는 수십 수백 가지 방법을 물어볼 일이다.
인천의 작은 쪽방촌이 헐렸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동안의 변화는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고 밀쳐내며 쌓아온 것이기에 인정받지 못한다. 그들이 어딘가 조금 더 나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다. 나의 다른 이름인 너, 그래서 우린 잊어버린 함께 살기를 다시 시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땅에서 기어이 살아야하기 때문에….
<도시 속 쉼표, 배다리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