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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민혁기(인천시 마을공동체 만들기 지원센터 정책팀장)
도입
얼마 전 협동조합을 통해 가르쳤던 제자가 연락해 왔다. 2018년에 졸업을 했으니 벌써 5년이 되었을까? 경찰이 된 그는 주취 난동으로 경찰관에 위해를 가한 이를 제압, 연행하는데 한몫하였다. 이때의 영상이 방송사 뉴스채널을 통해 나온 것이다. 이를 자랑할 겸 그리고 자랑스러워 하라 강요하기 위해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덕분에 난 잠시 옛 기억과 함께 뿌듯함에 웃을 일이 생겼다.
동료들과 함께 만들었던 협동조합은 대안 사교육이라는 가치를 내걸고 아이들을 만나왔던 터라 다양한 환경에 놓인 학생들을 두루 만나볼 수 있었다. 그때 만났던 친구들은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없는 환경에 있었다. 집-학교-학원이라는 닫힌 구조에 갇혀 무한경쟁체계 안에서 끊임없이 평가받고, 좌절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다양한 문제에 노출되어 언제 끝날지 모를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삶의 무게를 오롯이 혼자 지고 있었으니, 아이들로서는 감당하기가 참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구조 안에서 낙담하고 순응하며 자신이 속한 계층에 포기하듯 자리매김하려 했다.
한 예로, 성적이 늘 최하위권에 있던 제자 하나가 정말 열심히 공부하여 특정 과목에서 1등급을 만들어 냈다. 그러자 교무실에 불려가 ‘너 때문에 상위권의 다른 학생이 1등급을 놓쳤다’라며 되려 타박을 받았다. 최선을 다한 노력의 결과가 스승으로부터의 타박이라니 이 아이에게 세상은 어떤 곳으로 비쳤겠는가?
그런 환경에 있는 아이들이 제대로 사회를 인식하고 살아갈 힘을 갖게 하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다. 하지만 그런 어른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우선 가정이나 학교에서 형성되는 관계는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없기에 운명적이다. 여기에서 아이가 좋은 어른을 만난다는 것은 그 운명적인 어른이 스스로 좋은 어른이 되려고 노력해야 가능하다. 하지만 사회시스템의 영향을 철저하게 받는 부모나 선생의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한 여정은 만만치 않다. 마을이나 동네에서 좋은 어른을 만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동네 어른들에게 청소년들이란 마치 야생동물 같아 어찌 대해야 할지 까마득하기 때문이다. 아이들 역시 동네에서 만나는 어른은 숲에 있는 나무나 게임 속 NPC(Non-Player Character, 게임 속 움직이지 않는 캐릭터)처럼 무의미한 존재로 비칠지 모르겠다. 신뢰가 형성되지 않은 관계는 이렇게 서로에게 무가치하거나 무관심하다. 물론 이러한 관계를 공공이 갖는 공적 신뢰로 연결한 것이 마을 교육이다. 이 외에 다양한 방법으로 민간영역에서도 신뢰를 쌓아가며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경쟁 위주의 교육시스템 안에서 좋은 어른, 좋은 마을, 좋은 사회와의 만남을 강조하며 보장하라는 말은 몽상가가 떠드는 딴 세상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 않을까? 사회변화가 담보되지 않는 한 아이들의 무한경쟁은 여전히 작동할 테고, 아이들의 계급 또한 그 안에서 매겨지니 아이들에게 최우선 가치는 결국 성적이다.
그러니 아이들은 좋은 어른에게 갈 것 없이 이러한 환경에 함께 종속되어 있다는 동질감을 바탕으로 동년배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공감하고 위로하는 것이 익숙하다. 그리고 이러한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곳은 학교와 학원 그리고 그들이 모여있는 SNS가 된다. 결국 아이들에게 친숙한 관계망은 마을에 없다. 하긴 예전에 가르치던 아이들도 대부분 자력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면 지금 사는 동네를 떠나고 싶다고 한결같이 이야기했다. 현재의 속박을 벗어나는 것이 해방이라면 해방의 조건으로 동네와의 이별을 달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청년의 마을을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청소년기를 겪어 왔으니 현재를 살아가는 마을이 공감되기 힘들 것이고, 마을의 사람들이 주변인으로 보이며, 마을로부터 선한 무언가를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년과 마을을 이야기하는 것은 청년에게 변화를 강요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과 관점, 방향이 변해야 하는 문제다. 우리가 청년의 마을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여전히 동네의 사람이 좋아서고, 선한 영향을 서로 주고받으며 함께 생활하고 있는 터전에서 청년들과 더 행복하고 싶기 때문이니 말이다.
청년의 마을, 지금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들
나 역시 청년의 시기가 있었고, 주변엔 여전히 법적 청년이 많다. 법적 청년이라 함은 청년기본법과 인천시 조례에 근거를 둔 청년에 대한 개념인데, 인천은 만 39세까지를 청년으로 하고 있다. 청년의 시기에 청년정책네트워크 등에 참여하며 만났던 청년들의 특징을 기반으로 청년의 마을을 생각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물론 청소년기부터 좋은 어른이나 좋은 마을을 경험했던 청년들은 논외로 하자.
첫째, 청년은 아직 정주성이 온전히 형성되지 않았다. 정주성이란 어느 지역에 자리매김하며 살아가려는 성질인데 직업, 주거 형태 그리고 결혼 등에 영향을 받는다. 보통 20대에 학업을 이어가거나 취·창업을 하게 되는데 주거를 부모에 의탁하여 살지 않는 한 굳이 특정 지역에 정주할 수 없었다. 정착하여 안정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 많은 것을 결정하거나 포기하였을 때이다. 아직 삶의 방향과 형태를 확정하지 않았기에 그 시기의 청년은 유동성이 크다. 그러니 주거는 임시로 머무는 공간이며, 현재 사는 지역은 베드타운(bed-town)이 된다. 30대에는 보통 직업이 정해지고 결혼까지 하기도 한다. 이때가 되어서야 청년은 정주하여 살아갈 공간을 살피게 된다. 그런데도 마을이라는 공간에서 청년은 여전히 낯설고 데면데면한 이방인이며, 재산·주차·층간소음·자녀의 학업 문제 등 더 나은 것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가일 뿐이다. 개인의 책임이 더 중요한 사회를 학습, 경험해 왔기에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의 문화를 체득하지 못한 탓이다. 그러니 정주하더라도 정주성이 온전하지 않다.
둘째, 청년은 지역에 관계망이 없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청년의 거주공간은 임시적이다. 특정 지역에 자리매김한다 해도 여전히 초년이다. 임시적일 때의 마을은 굳이 관계 맺기가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아무리 마을은 사람이고, 관계망이며 친숙한 공간이라 이야기해도 청년의 마을은 최소한의 관계망만 유지하면 되는 닫힌데다가 비좁으며 언제든 상실되어도 무관한 임시사회이다. 어딘가 정착한 이후에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 하지만 초년에는 언제나 어렵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하다. 모르는 이의 호의에 고마움이 드는 한편 불신과 경계가 동시에 떠오른다. 직업과 역할에 따른 기능적 관계는 쉬우나 호혜와 상호부조를 바탕으로 하는 신뢰 관계는 피곤하고 어렵다. 그러니 닫힌 관계를 최소한만 유지하려 한다. 그런데도 공동체적 필요 그리고 외로움과 고립에 대한 두려움은 존재하기에 이 단계에서의 청년은 답보상태이며 스스로 마을을 만나기 어려운 시기라 할 수 있다.
셋째, 청년에겐 여전히 대안적 커뮤니티가 있다. 우리가 갖는 정서적 고통은 공감의 부재로 더욱 확대되고 지속된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립감과 외로움, 공감받지 못한 고통을 극복하고자 사람을 찾고 관계망을 형성하며 친숙한 공간을 확장해 간다. 하지만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청년에게는 마을에서 친숙한 관계망을 찾기보다 SNS에서의 관계망에 참여하기가 더 쉽다. 끈끈한 관계 형성을 통한 상호부조가 불가하지만 덜 피곤하며 느슨한 형태의 공감 커뮤니티는 속해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하고 가볍고 심심하지 않다. 얼굴 없는 온라인 커뮤니티와 간접적인 관계망은 책임과 감당해야 할 비용이 적다. 청년의 시기에 마을의 관계망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사생활의 노출, 품과 시간의 공유 등 불편함을 감수할 결단이 필요하다.
마을의 청년, 마을이 준비해야 할 방향
이를 바탕으로 마을의 청년을 생각해 보자. 마을에 청년이 있게 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감내해야 할까?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는 마을이 좋다거나 봉사하는 행위가 좋으니 청년도 당연히 참여해야 한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우선 청년이 정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주거공간과 일자리 그리고 정주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 내야 한다. 청년이 정착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주거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먹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일자리가 있어야 하며 쉽고 안전한 관계망까지 제시되어야 한다.
현재 공공에서 운영하는 청년 주거지원 정책은 저리의 대출이 기반인 임대주택과 월세 지원 정책 또는 기획된 청년 커뮤니티 하우스 임대 등이다. 이런 방식은 지역이나 마을과의 관계망 조성을 통한 정주성에 집중하기보다 청년 당사자의 주거 안정을 최우선 목적으로 한다. 또한 청년만의 공동체 조성으로 고립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가 있다.
일자리 역시 청년 당사자의 취·창업 그리고 청년을 고용한 기업에 대한 지원 등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관계망 형성은 지역 중심이 아닌 취향과 관심사 중심의 공동체나 동아리 정책일 뿐이다. 이러한 정책지향은 청년이 만나는 문제를 지역과 지역 중심의 관계망을 배제하고 당사자의 문제만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마을의 청년을 위하는 정책이라면 우선 마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 마을에서 공유주택을 소유하고 청년에게 무상 혹은 시장보다 낮은 월세로 주거공간을 제공하며 청년이 지역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일자리까지 연계하게 하는 방식 등이 있겠다. 또한 지역문제 해결을 위한 마을활동가, 코디네이터, 프로젝트 매니저 등의 역할을 공익형 일자리로 만들어 내거나 마을법인이 사회연대경제 영역에서 청년들과 연계해 사회적 가치와 경제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청년이 지역사회 내 마을활동가로서 지위를 갖게 하여 지역 관계망의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는 것도 좋겠다. 최근 인터뷰한 청년은 지역사회의 닫힌 공동체성과 관계망이 마을에서 활동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고 회고했다. 청년은 어디에서나 초년이기 때문에 관계망으로의 초대나 새로운 관계 형성을 위한 지원 등 마을에서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동시에 기존 마을구성원이 갖고 있던 역할과 권한을 청년에게 공유 또는 인계하는 것과 청년의 활동과 사업에 대해 책임지는 기반을 만들어 내는 것, 즉 마을이 사회적 안전망의 역할을 해줄 수 있다면 마을의 청년은 기꺼이 마을을 안전하고 친숙한 공간으로 여길 것이다. 정주의식은 이러한 친숙함과 편안한 관계망, 안락한 생활로부터 움트고 지역에서의 효용성이나 호혜성 기반의 단단하고 끈끈한 관계망으로 성숙되며 쌓여가는 마을 사람들의 밝은 미소와 따뜻한 말로 안정된다.
결언
오래된 마을의 활동가들은 종종 우리 마을에 청년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한다. 아마도 청년이 살지 않는다기보다는 눈에 띄지 않는다는 표현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청년은 이별을 준비한다. 취업이나 학업의 연장, 정착 등의 이유로 교통, 생활환경과 학군, 주거 형태 등을 고려하며 이주할 작정이다.
청년이 우리 마을에 정착하지 않는 이유는 공동체적 기반이 없어서다. 그리고 어차피 국가나 지방정부의 청년정책은 마을 단위 지역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청년이 살아갈 만한 환경을 지역에 조성하고 청년을 위한 공간을 유치하며 함께 어울려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해 주도해야 하는 건 누구일까? 지금까지 청년의 마을을 고민해 왔다면 이제 마을의 청년에 대해서도 고민할 때가 되었다. 마을의 미래가 청년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 마을에 활동하는 청년이 있는가는 결국 마을의 지속가능성을 판단하기 위한 지표가 될 것이다. 특별한 복지나 주거, 일자리 정책의 대상으로 여기기보다 우리 마을구성원의 하나로 청년이 등장하길 바라며 이러한 지역의 공동체적 기반이 당연한 것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러한 당위와 기반을 만들기 위한 정부와 민간의 역할과 책임이 곧 마을을 위한 청년정책이다.
인천광역시 마을공동체 만들기 지원센터 웹진 108호 동시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