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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하는 사회적 상속,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김만권 연세대학교 교수
유태인, 가족이 만드는 기초자본
유태인들은 아이들이 출생하고 1년이 지나면, 1주년 기념 축하파티를 연다. 우리의 돌잔치 정도에 해당된다고 보면 된다. 이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돌잔치에서 하듯이 축하 뜻으로 돈으로 부조를 한다. 부모들은 이 돈을 딴 곳에 쓰지 않고 모두 모아 아이의 이름으로 일종의 펀드에 가입한다.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유태인들은 아이들이 성장하는 동안 자신의 용돈 등을 벌어 쓰게 하면서 돈에 대한 관념, 경제생활에 필요한 기본지식 및 자세를 습득하도록 한다. 실제 유태인들이 13세가 되면 성인식을 치른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유태인들에게 이런 활동은 성인으로서 행하는 활동이 되는 셈이다. 이 성인식에 참여하는 사람들 역시 부조를 한다. 각 행사에서 집안 형편에 따라 작게는 1-2만 달러, 많게는 수십만 달러가 모인다고 한다. 핵심은 이 돈 역시 고스란히 아이들의 몫이 된다는 점이다. 이 돈은 저축, 투자 등의 형태로 계속 불어나 최소 원금의 두 배 이상 가는 상당 규모의 자본금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유태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숫자 18, 바로 열여덟 살이 되면 아이들은 이 돈을 자신이 스스로 결정해 운용할 수 있는 결정권을 갖게 된다. 간단히 말해 가족이 아이들이 성패의 유무와 관계없이 자신이 계획한 일을 해 볼 수 있는 일종의 인생출발 자금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내게도 이제 43개월 된, 우리 나이로 네 살인 아이가 있다. 유태인들의 이야기를 알고 나서 나는 어떻게 아이에게 이런 인생출발 자금을 만들어줄 수 있을까 생각해보게 됐다. 우리 아이는 돌잔치도 하지 않았고, 우리나라에서 성인은 18세이며 누구도 이렇게 요란하게 성인식을 치르지 않는다. 이런 규모의 인생출발 자금 조성은 유태인 문화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다 문득 작년부터 아동수당 10만원이 매달 지급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내와 상의 끝에 아이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고 매달 지급되는 수당 10만원을 넣어주기로 했다. 7세까지 지급된다고 하니 50개월, 최소 500만 원 정도의 투자금은 만들 수 있을 것이고, 각종 명절 등에 아이에게 용돈으로 생기는 돈도 일단은 모두 통장에 넣기로 했으니 규모는 작게나마 더 커질 것이다. 우리 부부는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면 최소 서너 배로 불어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자녀를 가진 대다수의 부모들이 알고 있듯 아동수당은 0-7세까지 모든 아이들에게 지급된다. 개월로 따지면 84개월이다. 이 수당을 아이를 위해 착실히 모을 수 있다면 현행 제도 아래선 840만 원 정도의 투자금을 만들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아이들에게 들어온 이러저러 용돈을 7세까지 모두 모을 수 있다면 1000만 원 정도가 될 것이다. 이 돈을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찾아 쓰지 않고 착실히 불려나간다면, 작게는 두 배, 많게는 서너 배로 불어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아동수당을 12세까지 지급하려는 움직임이 현실화된다면 그 규모는 훨씬 더 커질 수도 있다.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성공과 실패의 유무에 상관없이 자신의 인생계획을 실현해볼 수 있는 자금으로 작게는 2천만 원, 많게는 3천만 원 정도 줄 수 있다면 꽤나 괜찮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방식에도 문제는 있다. 이런 방식의 자본금 마련이 소득이 낮은 계층에서는 실행 가능한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마을이 마련하는 기초자본은 가능할까
내가 인생출발자금을 마련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사회구성원들 모두가 자신의 인생계획을 실현해볼 수 있는 실질적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소위 기초자본 제도가 지닌 설득력 때문이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더 큰 규모의 자본이 더 많은 부를 만든다. 소위 돈이 돈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로부터 더 많은 자본을 상속받는 계층들과 그렇지 못한 계층들 사이, 더 나아가 물려받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계층들 사이에 생겨날 불평등은 너무도 명백하다.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난다’는 출생은 운명의 영역으로, 우리가 사회적 자원을 분배할 때 가장 불공정한 요소이지만 공정성을 외치는 사람들이 쉽사리 외면해버린 것이기도 하다. 기초자본은 이런 사회현실에 반대하며, ‘부모가 상속할 수 없다면 사회가 상속하자’고 말한다.
이런 사회적 상속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정책의 실행 단위는 대개 국가다. 영국의 아동신탁기금 등 지금까지 관련된 대부분의 실험도 국가 단위로 이뤄져 왔고, ‘우리나라에서 20세가 된 모든 젊은이들에게 1000만 원 이상을 인생출발자금으로 주자’며 정의당이 제안한 ‘청년사회상속제’도 국가 단위 시행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렇다며 이런 정책이 반드시 국가단위로만 가능한 것일까?
나는 이런 정책이 우리가 평소에 의미하는 ‘마을’은 아닐지라도, 광역시에선 구 단위, 그 밖의 지역에서 시나 군 단위로도 시행이 가능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인천 ‘동구’에서 출생한 아이들이 있다고 하자(2018년 동구에서 출생한 신생아는 382명이었다). 이 아이들 모두에게 출생 시 구청이 아이들의 이름으로 계좌를 열어 300-500만 원 정도의 돈을 출산장려금의 형식으로 지급한다(300만원이면 12억, 500만원이면 20억 정도의 예산이 필요하다). 이를 구청이 투자처를 찾아 투자하여 인천 동구에서 성장해 20세에 이른 아이들에게 인생출발자금을 제공한다.
물론 몇 가지 제한이 있다(이 제한은 가상적 조건이며 구체적 조건은 공개논의를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 첫째, 아이들이 인천 ‘동구’에 실질적으로 거주한 기간이 10년 이상인 아이들만 받을 수 있으며 아이들은 부모 혹은 보호자와 성인이 될 때까지 반드시 같이 거주해야 한다. 거주기간을 채우지 못한 아이들의 투자금은 구청이 회수하여 거주 기간을 채운 수령인에게 나누어 지불한다. 둘째, 10년 이상 동구에서 성장한 아이들에게 지급하되 거주기간별로 차등해서 지불한다. 예를 들어 20년 동안 동구에서 성장한 이와 10년 동안 성장한 이는 수령액이 2배 이상 차이가 나도록 지급한다. 셋째, 돈을 수령한 이는 5년 이상 필수적으로 ‘동구’에 거주해야 하며 만약 5년 이내에 떠날 경우엔 수령한 돈을 구청에 반환해야 한다.
첫 번째 제한은 실질적으로 동구에서 성장한 이들에게 ‘기초자본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한다. 두 번째 제한은 더 오래 동구에 거주한 아이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는데 필요하다. 세 번째 제한은 이 돈을 수령한 뒤 바로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동구에서 지급한 혜택이 최대한 동구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데 필요하다.
이런 정책은 이 지역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이 인생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데 있어 기여할 뿐만 아니라 출생, 전출 등을 통해 인구가 줄어드는 문제를 어느 정도 완화하는데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이 하는 사회적 상속! 이렇게 시도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