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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하늘(여럿이함께하는동네야놀자 실무활동가)
젊은 애들은 왜 동네에 없을까? 최근 몇 년간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그러게요, 왜 없을까요” 애써 그렇게 얼버무린 기억이 떠오른다.
청년들이 동네에 없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고, 내 의견이 일반화되는 것도 원치 않고 내가 맺고 있는 마을과의 관계가 상당히 특이한 경우이기 때문에 말을 아꼈었다.
나는 어떠한 정책이나 전문적인 내용이 아닌 현재 마을공동체 활동가로서 살아가고 싶은 한 청년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나는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청천동이란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 동네의 맑은 천이 있었다고 해서 청천동이란 지명을 사용했다는데 살면서 한 번도 맑은 천을 본 적은 없다.
그 당시 우리 집 인근은 외국인 근로자와 저소득층 근로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우리 집도 아버지가 일용직 근로자였고 근처에 사는 친구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비행 청소년이 많은 동네였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고 조심스럽게 고백해본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민감한 사항 중 하나인 학교폭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방과 후 친구들과 모여 흡연과 음주를 하고 다니는 불량한 학생 중 하나였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될 무렵 나와 내 친구들이 자주 머무르던 <뫼골공원> 이란 곳에 처음 보는 건물이 생기게 되었다.
우리들은 당연히 그 건물 옆 놀이터에서 방과 후를 보내었고, 당시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난 뒤 자연스레 친구들이 그 건물에서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 건물은 <뫼골문화회관>이란 곳이었고 1층엔 <카페쉼표>라는 이름의 카페가 운영됐다. 돌이켜보면 창피한 짓이지만 그때는 음료 두어 잔만 시켜놓고 대여섯 명이 시간을 때우는 나날을 보내곤 했다.
그 이후 방학을 맞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사건으로 당시 카페 매니저님과 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우리들에게 “너희들 카페에서 자원봉사 해보지 않을래?” 라는 제안을 주셔서 우리는 공원 인근의 골칫덩이에서 자원봉사 하는 아이들이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단숨에 착해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사소한 말썽들을 부렸고 카페를 이용하는 어른들에게 꾸준한 잔소리도 들었다.
이런 나날들 속에 나와 내 친구들은 카페뿐만이 아닌 카페 위에 사무국에서 일하시는 분들과도 친해지게 되었고, 그때 활동가로 있던 형과 종종 저녁도 같이 먹으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래퍼가 되고 싶었다.
중학교 시절엔 방송 댄스와 비보이를 접하게 되었고 그 흐름이 자연스레 힙합 음악에 빠져 고등학교를 올라가면서 래퍼가 되어야겠다고 생각이 들어 도봉산 인근에 같은 크루 멤버의 작업실을 오가곤 했고, 그 이후엔 녹음 장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었다.
그렇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업물들을 만들고 방과 후엔 아르바이트를 하고 지내면서 점차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을 뫼골문화회관 활동가 형과 나누는 자리가 있었고 너무나 감사하게도 당시에 같이 봉사활동을 하던 내 친구들, 후배들과 함께 <청소년 데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었다.
카페 음료를 3분의 1 가격으로 청소년들에게 제공하고 캐리커처, 타로카드 등 체험프로그램과 마지막은 공연으로 마무리하는 <청소년 데이> 프로그램을 몇 달간 진행하였고, 그렇게 나의 소원이었던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런 활동을 경험해본 후 나는 어렴풋하게 이곳이 마을공동체 활동을 하는 곳이란 걸 알게 되었고 조금씩 단체에서 진행하는 활동들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게 내 고등학교 생활이 끝나갈 무렵 어떤 제안이 하나 들어왔다.
“사무국에서 같이 일해보지 않을래?”
활동가 형의 제안이었다. 지원사업을 통해서 청소년 진로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던 상황에 나를 인턴을 채용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처음엔 걱정이 많았다. 어떠한 행정적인 업무를 해본 적 없는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일을 시작하면 음악 생활에 지장은 없을까?’ 라는 생각에 단번에 수락할 순 없었지만 내 이런 고민들을 알기라도 한건지 공동체에서 많은 배려를 해준 끝에 함께하게 되었다.
이게 내 공동체 활동의 첫 출발점이었고, 약 2년간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어렴풋하던 공동체가 무엇인지 인지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다행히 음악 활동도 잘 병행 할 수 있었다.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인 기획공연과 작업물을 만들었고, 단체에 행사가 없는 날은 공연을 하러 다니기도 하였다.
그런 나날들을 보내던 중 앞으로 계속 이렇게 병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 고민하는 시기가 나타났고 한번은 내가 정말로 원하던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결심을 다지고 공동체와 이야기 끝에 래퍼로서의 삶을 살아보기로 하고 단체를 떠나게 된다.
그렇게 몇 년간 자잘한 외주들과 공연을 하고 래퍼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아갔다. 그러나 결국 난 1장의 싱글 앨범과 1권의 독립출판물을 끝으로 래퍼로서의 삶을 정리하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동안 미뤄왔던 군복무(사회복무요원)도 갑작스럽게 시작하게 되면서 내가 그동안 해왔던 모든 활동이 올스탑되었고, 내적 외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다행히 내 갑작스런 군복무를 알게 된 공동체에서 그동안 해왔던 활동을 기억해 주시고 겸직 허가를 받게 되어 자잘한 외주 등을 주시면서 또다시 공동체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마을공동체가 다른 이유없이 나를 받아준 것이다.
그렇게 군복무가 마무리되어가는 시기가 다가오며 다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그만둔 음악을 시작할 것인가, 혹은 공동체 활동을 할 것인가.
오랜 고민 끝에 한번 공동체 활동가로서 살아보기로 결심하고 소집해제 후에 이전에 함께하던 공동체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이후로 더 깊게 공동체가 무엇인지 공부하는 시간도 있었고 여러 일을 경험하며 지금은 ‘청년들과 마을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에게 마을은 편안한가?
난 이제는 마을이 편안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방황했던 그 시기엔 내 존재 자체로 바라보지 않고 그저 동네에서 껌 씹는 친구 누구 정도로 바라보던 시선이 싫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공동체에선 그런 프레임 없이 온전한 ‘나’로 바라봐 주었고 나도 그들을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시간을 만들어 줬다.
현재 청년들이 마을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마을이 편안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어떤 마을 행사가 있다고 하자. 나는 그곳이 어떤 행사를 하는지 궁금해서 참여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행사의 주체가 되는 사람들에게 우리 청년들은 단순한 인력으로만 보이고 있지는 않았을까?
우리도 마을에 사는 주민으로 참여하고 싶어도 단순히 혈기왕성하고 젊은 청년으로만 소비된다고 느끼고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나와 내 주변의 청년들은 잘 쉬고 싶어한다. 단순한 휴식의 개념도 있겠지만 사회적인 역할을 벗어나 온전한 ‘나’로서 관계하고 유지되길 바란다.
이런 마음을 마을에서 품어 줄 수 있게 되면 자연스레 청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믿는다. 또한 나는 지속해서 마을과 청년의 사이에서 함께 할 날을 만들어 갈 것이다.
인천광역시 마을공동체 만들기 지원센터 웹진 107호 동시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