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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대안, 마을공동체
글 | 김정열 (인천시마을공동체지원센터 센터장)
코로나19가 처음 발생했을 때, 유엔 산하 전문기구인 세계보건기구(WHO)는 연일 방송을 통해 전 세계가 하나가 되어 이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고 설파했습니다. 하지만 세계보건기구는 실제로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백신 개발이 즉각적으로 시작되었지만, 대부분의 백신은 선진국 중심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국가는 백신을 구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습니다. 코로나19 초기 마스크 대란이 일어났습니다. 비록 금방 진정되긴 했지만 진정되기까지 국민들은 혼란 속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국가는 마스크 사재기를 못하도록 통제하고 질서를 잡아가는 일을 하기는 했지만 결국 피부에 와 닿는 실효성 있는 정책은 펼치지 못했습니다. 일반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을 해소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안정감을 주는 일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일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한 것은 지역의 작은 공동체들이었습니다. 소위 마을공동체라고 불리는 로컬 단위의 주민들이 협력하여 마스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환경을 생각하며 일회용이 아닌 면으로 마스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공간을 빌려주기도 하고, 마스크를 만들기 위한 면을 제공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재봉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만들어 낸 마스크는 지역의 소외된 이들, 특히 경제적 소외 계층에 전달되었습니다. 비록 많은 수의 마스크는 아니지만 지역에 자생하고 있는 마을공동체가 발벗고 나선 결과로 누군가는 위로와 안정을 얻었으며, 어떤 이들은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과 함께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을 것입니다. 국가가 할 수 없는 일을 아주 작은 지역의 공동체들이 연대하고 연결함으로써 그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여러 사람을 위로하고 안정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들이 활발하게 지역을 살리고 새로운 도전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국가나 지방자치 단체가 할 수 없는 일을 지역의 주민들이 모여 의논하고 지혜를 모아 대안을 마련하며 더 행복한 지역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곳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일본의 동경에 세타가야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세타가야 트러스트 엔 커뮤니티 디자인”(Setagaya Trust & Community Design, http://www.setagayatm.or.jp)이라는 재단이 있습니다. 이 재단은 지난 2005년에 세워진 이래 지역의 자연환경은 물론 역사, 문화 환경을 보전한 지역, 안전하고 공생이 가능한 마을, 거주 환경이 매력적이고 다양한 활동이나 커뮤니티가 가능한 동네를 만들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재단이 하는 일은 여느 지역의 마을 관련 단체와 다를 바 없지만, 그 태생을 살펴보면 의미가 남다릅니다. 1990년대 후반 동경에 속한 자치구인 세타가야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지방 분권으로 인한 부담은 가중되는 가운데 급격한 저출생과 노령인구의 증가, 범죄의 증가 등을 막는 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자치구 단위의 마을만들기(community design) 부서가 운영되고 있었지만 이런 과제들을 극복하려면 결국 행정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그즈음 세타가야에 있는 민간 영역에서도 행정에서 걱정하는 것과 유사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시민들은 자발적인 자산 기증과 기부를 통해 보존 가치가 높은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확보했습니다. 이를 통해 시민의 소유로 영구히 보전하고 관리하는 시민운동인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 운동에서 착안한 세타가야 트러스트(Setagaya Trust)를 결성하여 새로운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결국 세타가야 자치구 행정과 주민들이 함께 모여 재단을 설립하고 다양한 활동을 공동으로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주민과 행정이 하나가 되어 세타가야 지역을 후대에 잘 보전된 상태로 물려주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자연환경이나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후대에 물려주는 기존의 내셔널트러스트의 정신을 넘어서 자치구와 지역 구민을 연결하고, 주민과 주민을 연결하여 오늘날의 도시 환경문제나 삶의 질을 높이고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마을을 형성해 나가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며 마을공동체 운동을 확산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들은 마을 소식지, 보급계발 및 지역공생 집 운영은 물론 다른 지역의 마을만들기를 전문적으로 돕습니다. 또 마을을 교육 자원으로 활용하여 다른 지역의 학생이나 체험을 원하는 이에게 생태 자연을 관찰하고 체험할 수 있는 활동을 진행하고 마을 투어나 대학생 인턴십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호혜와 지속 가능한 마을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것도 행정의 과감한 투자, 주민들과의 적극적인 결합으로 자치구 전체를 더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어 가는 매우 의미 있는 사례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다양한 형태의 마을 기반 공동체들이 형성되어 있고 활발하게 진화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마을 가운데 서울 강북구의 ‘삼각산재미난마을’(1998)이 있습니다. 삼각산재미난마을의 설립 이유와 그 과정을 보면 다른 지역의 마을공동체와 유사한 점들이 있습니다. 삼각산재미난마을은 처음에 ‘공동육아’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했습니다. 육아 문제는 자녀를 둔 부모는 물론이고 지역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특히 대학진학까지, 그리고 앞으로 사회의 일원이 되는 그 과정 전부를 염두에 둔 일이기에 부모들은 그 어떤 문제보다 예민하고 적극적인 대안을 모색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지자체를 비롯하여 동네마다 학령기의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에 드는 교육기관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다양한 교육기관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비슷한 고민을 가진 학부모들이 모여 공동육아를 계획하게 되고, 경제적 부조를 통하여 어린이집을 직접 운영하기에 이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들의 자녀를 위탁하는 대신 공동육아 공간을 함께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음 발걸음에 필요한 공간이나 사람들이 결합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로 확장되고 진보해 나갑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2003년, 대안 초등과정을 “삼각산재미난학교”의 이름으로 개교합니다. 2021년부터는 서울형 대안학교의 틀 안에서 중등 과정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제 삼각산재미난마을의 어린이집을 통해 자라난 아이들이 청년이 되어 다음 세대의 마을을 준비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간의 연대와 노력이 하나의 실험에 그치지 않고 한 세대를 넘겨 가며 새로운 대안 공동체로 형성, 발전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을공동체나 마을 운동이 처음부터 이렇게 큰 규모로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작고 소소하게 운영됩니다. 어떤 분들은 뜨개질을 하는 모임을 진행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지역의 공간을 운영하기도 합니다. 하나의 커다란 커뮤니티를 형성하기 전에 3-4명이 모여 작은 마을공동체를 경험하며 유사한 다른 모임과 연결되기도 하고 확대되기도 합니다. 그동안 인천시에서는 이런 작은 모임들을 지원해 왔습니다. 흔히 공모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주민참여예산이라는 이름으로 지역에 있는 다양한 공동체를 지원하고 활성화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혹자는 취미활동을 지원하거나 동호회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뜨개질 모임을 예로 들어보면, 그분들은 평소 뜨개질을 취미로 가진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가장 작은 비용을 지원받으며 만들어 내는 것은 수세미 종류입니다. 짐작이 가는 대목입니다. 지구가 앓고 있는 몸살, 소위 기후 위기나 생태환경의 위기를 생각하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방법을 그렇게 자신들의 취미를 활용하여 실천하는 것입니다. 작은 규모의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은 대부분이 이렇게 진행됩니다.
마을공동체를 지원하는 공모사업의 추이를 살펴보면 이런 모임들이 눈에 띄게 증가했습니다. 환경이나 생태 문제, 기후 위기의 문제를 이제는 개개인이 모여서 어떻게 해서라도 보완하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생각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임들이 동네마다, 마을마다 3-4개씩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도 노력하겠지만 결국 가장 작은 단위의 주민이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즘은 청년 1인 가구에 대한 문제의식이 두드러지게 많아지고 있습니다. 유행처럼 혼밥이나 혼술이라는 말이 사용되곤 하지만, 이런 용어들은 우리가 처한 비자발적 고독을 미화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들을 과연 누가 해결할 수 있을까요? 국가 차원의 제도나 정책으로 가능할까요? 그렇다면 이런 문제는 어느 부서에서 해야 할까요? 복지예산을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청년 일자리 관련 예산으로 해결해야 할까요?
이런 문제의 핵심 당사자들 가운데 청년들이 직접 이 문제들과 관련한 다양한 시도를 하는 자치구도 있습니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이런 틈새에 끼어 있는 문제를 공론화하고 함께 고민하는 모임을 마을에서 갖도록 지원하기도 합니다. 함께 모여 토론도 하고 함께 음식을 만들기도 하며 고립감을 벗어나 본인이 속한 지역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되고 나아가 무엇인가 기여하고 싶은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함께 모여서 이야기하다 보니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보이지 않는 작용을 서로 하게 됩니다. 더 큰 단위의 행정에 본인들의 어려움을 하소연하기보다는 당사자들끼리 이야기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작은 프로그램이라도 운영하려는 실효적 방법들을 마을 안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4월 서울시 중랑구에서 다양한 마을공동체를 지원하기 위한 공모사업을 시행하면서 아예 1인 가구를 대상으로 한 사업들을 특화하여 공모한 적이 있습니다. 총 8개 팀이 공모에 응했고, 그 가운데 4개 공동체가 선정되었습니다. 4개의 공동체 가운데 3개가 청년 1인 가구의 문제를 고민하는 모임들로 선정되었고 그들이 처한 상황은 대동소이합니다.
예를 들어 1인 가구로 살아가는 대다수의 청년은 고독과 외로움을 느끼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식단 관리나 영양 관리가 안 되어 건강 문제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녁이면 안전 문제로 인하여 두려움을 느끼는 청년도 많고, 심지어 혼자서 집을 구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고 토로합니다. 그런 청년이 모여 함께 음식도 만들어서 나누어 먹고, 다양한 문화를 공유하며, 젊은 예술가로 구성된 모임이 펼치는 공연도 관람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합니다. 건강을 위한 자전거 타기를 함께 한다든지, 간단하게나마 호신술을 배우기도 합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약 6개월 정도 운영하는데 자치구가 지원하는 비용은 200-300만원 사이입니다. 여기에 자신들이 전체 비용의 5% 정도를 부담하는 자부담 원칙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치구에 흩어져 존재하는 모임들이지만 함께 진행하는 마을공동체와 관련한 여러 교육에 함께 참여하거나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한 전체 모임에 참여하여 다른 청년과 교류하고 정보를 나누는 기회를 얻습니다. 이미 지난해까지의 경험을 통해 유추해보면 모든 어려움이 사라지고 완전한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지역에서 혼자라는 고독감은 옅어지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이웃이 생기며, 나와 유사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연결됨으로써 더 많은 지지와 든든한 연대감을 느끼게 됩니다.
비록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3-4명이 6-7개월 동안 함께 기획하고 성장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마중물이 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활동을 지원하는 다양한 기관도 인천시와 자치구에서 운영 중입니다. 인천시 차원의 인천시마을공동체지원센터나 자치구 단위의 마을자치센터 등이 앞장서서 돕고 있고, 이와는 별개로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려는 시민을 위한 시민지원기관들이 전문성을 가지고 돕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전 세계가 하나로 묶여 있기도 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속해 있기도 합니다. 이런 거대 공동체 말고도 광역시도나 자치구에도 소속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행정적인 처리로 묶여 있는 것입니다. 이런 큰 행정 중심의 공동체는 세계의 문제나 국가의 문제를 우리를 대신해 처리해 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거대 공동체, 다자간 협의체의 담론에는 우리 개개인이나 작은 공동체에 관한 관심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전 세계적인 기후 위기나 식량난, 신종 바이러스로 인한 공포, 고갈되어 가는 자원 문제 등도 결국엔 국제기구나 국가보다는 지역의 활동가가 실현해 나가고 있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오늘날 가장 활발한 환경 운동은 누가 주도합니까? 유엔의 전문기구나 혹은 국가 차원의 노력도 진행되고 있지만 그들보다 더 영향력 있는 행동은 스톡홀름의 작은 마을에 사는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가 아닌가요? 저는 유엔이나 국가, 혹은 행정의 무위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둘 사이의 역할을 나누고 그것을 서로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실핏줄처럼 퍼져 있는 지역의 작은 공동체가, 그리고 그 속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주민의 도움이 없이는 자치구든 광역의 행정이든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인천시와 여러 자치구에서는 이런 대안으로 충분한 실험을 해왔습니다. 작은 공동체를 지원하고 그들을 연결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간의 마을공동체와 관련된 실험은 수많은 평범한 개인을 전 지구적 문제와 연결해 왔고 평범했던 시민들은 자신이 사는 골목 안에서 기후 위기와 환경, 에너지 재생이나 도시화의 문제를 의논하고 대안을 스스로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자치구에서는 이런 조직을 더욱 체계적으로 돕기 위해 ‘주민자치’라는 방법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골목과 동네의 문제부터 함께 겪고 있는 이 시대의 문제까지 두루 이야기할 수 있는 구조를 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서로 연결하고 연대하여 집단 지성을 발휘하고 적극적인 대안 모색을 해 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 확고하게 인식한 것입니다.
참고 사진
희망제작소(https://www.makehope.org/잇는-것을-이어서-만든-재미난-마을)
무료 이미지(https://www.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