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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이 되니 마을 속 생의 주기를 보게 되었어요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29 18:52
조회
309

 


 


십정동 열우물이 궁금해! ①


사회적기업 <인천자바르떼> 이찬영 대표와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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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단체명인 ‘자바르떼’는 무슨 뜻인가?


자바르떼(Jobarte)는 잡(JOB), 아트(ART), 플레이(PLAY)를 조합해 만든 말이다. 사람들에겐 의식주 뿐 아니라 일과 예술과 놀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예술을 통해서 일정하게 생계를 유지하는 부분들이 필요하다. 이런 내용들이 담긴 뜻이다. 최초에는 예술가들에게 일자리를 주자는 것이 시작이었다. IMF때 예술가들이 실직을 많이 당해서 예술가들이 일정한 수입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만든 단체다.


 


Q) 개별 단체가 아니라 전국조직인가? 서울과 경기 자바르떼도 있던데.


2004년도에 자바르떼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서울, 인천, 경기 안산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신나는 문화학교 교사협회’ 예술가들의 강사 모임이 있었다. 문화예술교육에는 문화체험, 기획(공연예술, 행사), 교육 파트가 있는데 소외계층에게 문화서비스가 필요하단 생각에 문화예술교육 중심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2005년에 문화예술교육진흥법이 통과되면서 정부 차원에서 이러한 사업을 많이 진행하기 시작했다. 사업적 측면에서 보면 자바르떼가 정부보다 빠른 측면이 있었다. 최초에는 예술가 한 사람이 3-4개정도 수업을 했으니 인천지역만 해도 4-50개 수업을 했다.


정부에서 문화사업을 지원하게 된 것은 ‘대한민국이 지속적인 저성장 구조를 어떻게 타개해 갈 것인가’ 라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문화계에서는 이 사안을 인재들의 인프라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고, 당시에는 그게 창의성으로 표현되었다. 인간의 창의성을 키우기 위해서 문화예술 교육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마을만들기를 하는 곳은 어느 지역이든 그런 문화예술프로그램과 연결되어 있다. 문화를 단순히 도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하는 것의 다른 측면, 발달이나 교육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 것이다.


 


Q) 문화단체가 사회적기업이 된 과정이 궁금하다.


2007년에 사회적기업이라는 제도가 생겼는데, 당시 노동부로부터 사회적기업 제안을 받았다. 그래서 자바르떼는 문화예술로는 두 번째 사회적기업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문화예술 교육만 하던 영역들이 공연, 체험, 기획의 형태로 늘어나게 되었다. 2005년부터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 10년이 되었다. 서울, 경기, 인천 세 지역을 포괄해 진행하다가 지금은 독립법인으로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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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우물 마을축제. 지역 자생단체와 학교, 문화단체, 교회, 주민참여예산 등과 함께 준비위원회를 꾸려 진행했다.



 


Q) 문화예술이 마을과 만나는 접점은 어디서 생기는가?


사업을 하면서 마을을 보게 된 계기는 간단하다. 문화예술교육을 하다 보면 대상을 고려하게 되고, 동네와 만날 수밖에 없다. 문화는 내 삶의 양식과 부딪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문화예술교육의 핵심은 '그림을 잘 그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삶의 이야기를 하는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마을은 생애주기가 있는, 생로병사의 순환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예술교육이라기 보단 문화교육의 방향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십정동과는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열우물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진우 선생이 “마을잔치를 할 계획인데 같이 하자”는 제안을 해서 ‘그정도쯤은!’ 하는 마음에 시작하게 됐다.


 


Q) 십정동 열우물에서 했던 일들에 대해 소개해 주신다면.


당시 정부 기금중에 주민 생활을 바꾸는 공동체기금이 대거 있었다. 사회적기업은 엔터테인(Entertain, 즐겁게 해주다)이 아니라 엔터프라이즈(Enterprise, 회사)다. 문화부 사업 선정과 동시에 활동을 넓힐 필요를 느껴 <열우물 오래된 미래-생활문화공동체 사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배보다 배꼽이 커졌다. 애초 열우물길 프로젝트는 작은 계획이었는데 수천만원의 예산이 들어오니 마을에서 다양한 사업을 하게 된 것이다. 주민의 요구를 물어가며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2011년부터는 동네로 이사를 와서 주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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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우물 구시장 골목에서 진행된 소소한 문화파티. 작은 영화제를 열었다.



 


Q) 열우물은 인천에서도 대표적으로 오래되고, 낙후된 동네다. 프로젝트로 들어왔는데 이제는 주민이 된 이유가 있나?


우리 애 때문이었다. 계산동에 살고 있었는데, 아이가 학교를 가야 했고, 나는 사무실이 가깝고. 동네에서 일을 하고 있고, 인천의 지역아동센터와 공부방 연합회와 사업을 많이 하고 있었다. 공부방을 보내야겠다는 판단을 했을 때 <해님방>을 추천하더라. <해님방>이 주민센터 역할을 하긴 하지만 가장 먼저 시작한 사업이 공부방이었다. 가서 물어보니 받아주겠다고 하기에 이사를 가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주민되기’라는 개념 때문이었다. 공공예술이 자칫하면 공동체에 들어가서 치고 빠지기가 되기 쉽다. 기금에 의해 사업을 하고 기금이 떨어지면 빠져나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을에서 기타 치는 사람을 사업에 끌어들이면 주민활동 하는 것 같아 보여도 내가 보기엔 아니다. 예술이 동원되고 도구화되는 것일 뿐이다. 마을을 이루는 곳에는 사회·정치·경제·문화 모든 것이 다 있다. 삶이란 건 그런 거니까. 그 모든 것의 중심에 문화만 있을 수는 없다. 다양한 스펙트럼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겪는다. 다만 이것이 소통되고 흐르느냐는 것이 문제다. 그런 역할 중 하나가 문화라고 본 것이다.


2011년에는 마치 마을을 변화시킬 것처럼 온갖 뻥을 치고 다녔는데,(웃음) 2013부터는 문화예술은 부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예를 들어 마을의 어떤 분들은 동네잔치를 좋아하지만 싫은 사람도 있다. 다만 좋아하는 사람이 마을잔치의 필요성을 느낀다면 싫은 사람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마을의 문화사업은 그런 식으로 정리된다. 주민이 되어 살면서 문화사업을 하면 훨씬 재미있고 유리한 게 많다. 늘 거시적인 관점으로 인천이라는 큰 도시를 보다가 부평구->십정동->우리 동네 골목길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또한 하나의 세계다. 미시적인 것들은 거시적인 것들과 소통하는 기본적인 구조가 있는 거고. 그걸 마을이라고 보면 문화예술은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빠지는 게 아니라 주민되기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주민이 되니까 동네사람과 어울리고, 슈퍼도 가고, 동네에 없는 것도 필요를 느끼게 된다.


 


Q) 육아라는 필요에 의해서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주민의 눈을 갖게 된 발견의 순간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내용이 많이 변화했다. 커뮤니티를 활용한 프로젝트를 얘기하는 예술가들을 보면 공공성이 보이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우려되는 측면이 많다. 동네에 피아노 학원, 오카리나 학원, 우쿠렐레 학원이 다 있듯이 각자의 일을 하다가 연결되고, 헤어지는 것이다. 대단한 일처럼 포장하고 다닐 필요가 없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꺼풀만 벗겨 내면 뻥인 게 많다.(웃음) 문화사업은 그렇게 진행했고, 동네에서는 애를 키우니까 공부방과 관계를 맺게 됐고. 학교와의 관계가 생기면서 학교 운영위원도 해봤고. 많은 일들이 생겨났다.


 


 



Q) 십정동 열우물 이야기


 


*쫓겨난 사람들


열우물이라는 지역이 아주 재미있는 곳이다. 제물포가 만들어지는 과정부터 살펴보자. 정부가 제물포 일대에 학교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면서 쫓겨난 사람들이 이 동네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원래 이곳은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다. 슬픈 역사다. 동인천이 발달하면서 밀려난 사람들이 동구와 수도국산으로 이주한 뒤, 공단이 만들어지면서 또 밀려서 제물포 일대 판자촌을 짓고 살았는데, 학교를 만들기 위해 강제로 토지를 수용했으니 공동묘지까지 온 것이다. 원랜 여기까지 갯벌이었는데 공단을 만드느라 메운 거고 원래 열우물은 좀더 산쪽이다.


 


*동네에 주민조직이 생겨나다


공단이 생기니 걸어서 5분 거리에 일터가 있잖나. 70-80년대 시골에서 혈혈단신 올라와 하꼬방 한 칸에 살며 일하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그러니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들어와 주민들을 조직해 <열우물 주민회> 같은 것을 만들어서 문예교육을 시작한 거다. 말하자면 야학에서 한글교육 등이 시작된 것이지. 그러다 보니 청춘 남녀가 결혼하고 아이도 생기니 아이들을 돌보는 공부방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해님공부방>은 노동운동에 헌신한 활동가들이 일종의 야학으로 시작한 곳이다. 지금은 주민조직이 화두지만, 당시에는 노동운동 조직가들이 동네에서 뭔가를 하고 일을 벌이는 게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당시에는 서구 지역에서 사민주의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신문을 가장 먼저 발행했기 때문에 열우물 신문을 발행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열우물 소식지가 나오는 것이다. 또, 당시에는 사회단체 운동가들이 전통문화를 지켜내는 일을 많이 했다. 대학에서 일어난 탈춤부흥운동과도 연결되는 대목이다. 그럼 동네에서는 짚신밟기, 단오놀이 등을 했겠지? 할아버지 할머니 꼬셔서 씨름도 하고 설탕도 나눠 줬을 것이다. 구시장 골목에는 얼마나 사람들이 많았겠나. 그게 90년대까지 이어진 거다. 어떻게 보면 마을만들기에서 하는 일들은 이미 그때 다 한 일들이다.


 


*붉어진 재개발 문제


이후 동네에 재개발 문제가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면 집값은 오르고, 고치지도 못하고 대책이 없어진다. 개발 소식에 투기꾼들이 들어왔다. 하지만 20년째 개발은 요원한 상태다. 정보가 빨라 투자 명목으로 들어왔던 사람들은 아직까지 묶여 있고, 개발대상지역이라 아직도 화장실이나 지붕을 못 고치고 계속 낙후되어가는 실정이다. 동네 사람 중에는 돈을 번 사람도 있겠지만 자식들을 여기에 살게 하기 싫으니 외지로 보낸 경우가 많다.


이후에는 한국 사람들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와서 살았다. 공단이 있으니까. 그게 90년대 중·후반 이야기다. 근데 지금은 이주노동자들이 다 이사를 갔다. 이주노동자 월급만 있어도 여기 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제는 정말 끝자락까지 밀려서 마지못해 사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 주민들은 두 부류다. 집 주인인데 어릴 때부터 살아왔으니 사는 경우, 아니면 정말 밀리고 밀려서 온 사람들이다. 재개발 논의가 나오면 주민공동체 사업은 무너지게 되어 있다.


 


*지방자치와 노동운동의 산실 열우물


92년 이후에 지방자치제도가 생길 때 동네에서 낸 후보가 지금의 부평구청장이다. 구의원-시의원-국회의원을 거쳐 구청장이 되었으니 열우물이 지자체 활동 역사의 출발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학생운동 출신들이 노동운동으로 투신하는 과정도 담겨 있다. 내가 학생 때 후배들이 야학하러 이곳에 많이 왔었다. 그런데 내가 와서 살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이제야 동네를 보게 된 것이다. 지금도 <해님방>을 중심으로 하는 모임이 진행되고 있고, 공부방도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단순참여 하는 수준이다. 그걸 끌어내서 해보자는 논의는 있지만 그렇게 마을활동을 할 정도의 경제적 받침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만들기·주민센터 운동이 중산층 운동이라고도 불리잖나. 이곳은 계속 낙후되어 가고, 빈 집도 늘어나고 있다. 이곳의 90%는 외지인 소유다. 송림동 숭의동에서 밀린 마지막 동네이기에 여기서도 밀리게 되면 주민들에겐 대책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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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우물 뽕짝 할머니 노래교실



Q) 동네 스토리를 들으니 가보기 전부터 궁금함으로 다가오고, 애정이 생긴다. 주민되기를 실행하게 된 것도 그런 매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마을사업에서 자바르떼가 주로 했던 것은 동아리를 만드는 일이었다. 주민의 니즈(필요)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랬더니 청소년들이 갈 곳이 없다고 해서 청소년 밴드를 만들고, 40-50대 동네 가정주부 분들이 연극을 하고 싶다고 해서 주부수다연극을 만들었다. 할머니들은 민요를 이야기하시더라. 그런데 2010년의 할머니를 60대 중반으로 봤을 때 그들은 민요가 아니라 엔까 세대다. 민요세대는 오히려 40대다. 40대는 대학에서 민요패라든가 공동체문화들을 들었던 세대기 때문이다. 60대는 그런 경험이 의외로 없다. 그래서 뽕짝 노래교실을 지금도 목요일마다 하고 있다. 주부연극교실같은 경우, 여자들 모임이니 생활지도 만들어보고, 동아리 발표회도 하게 되니 마을잔치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럼 마을 유지들이 와서 훈수 두고 싶겠지? 그럼 다 받아주는 거다. 그렇게 어울리는 마을잔치는 9월에 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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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공간 '두레박'



진짜 하고싶은 일은 동네에 커뮤니티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교회가 내어준 공간을 <두레박>이라는 공간으로 만들어 한 달에 한번 문화파티를 한다. 지금도 꾸준히 진행 중이다. 동네 사람들이랑 노는 건 재밌다. 자바르떼는 문화사업 기금을 좀 받을수 있는 단체 성격이니까 활용해서 적용하기도 한다. 그 다음엔 더 생활로 들어갔다. 2013-2014까지는 생활재 만드는 일들을 했다. 오미자 담그기, 퀼트, 바느질, 드로잉교실, 가양주 빚기, 비누 만들기 등을 했는데 이제는 단순 체험 프로그램은 한계가 온 것 같다. 자본주의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방식들 워낙 많이 하니까 적정기술, 자립생산, 도시농업과 같은 이야기를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도시농업은 이미 다 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건 이걸 의제화해서 프로젝트화 시키는 것이다. 최근 적정기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려 두레박 1층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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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이 생활제 만드는 일을 함께 진행했다.



개인적으로는 구술사를 남기고 싶다. 가난한 사람들의 역사는 되게 중요하다. 그 옛날 이순신 혼자 해전에서 승리했겠나? 노 젓는 사람도 있었겠지. 기록하는 게 중요한 이유는 개인의 삶은 사회적 삶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경험으로만 끝낼 수 없는 것이다. 그걸 의제화시켜 내는 것이 마을에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2010년에 구술채록을 남기는 작업을 했다. 동네 젊은이들이 했으면 좋겠는데 그건 어렵고, 인천대학교에 다니는 남구 대학생 기자단이 와서 채록을 했다. 앞으로 프로젝트는 노인의 삶 보다는 청년들의 삶에 주목할 생각이다. 이 동네에서 자라서 성장한 아이들이 다시 공부방 선생님이 되는 이야기를 구술하고 싶었다. 어른들과는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Q) 기획자로서의 활동을 하게 된 것이나 동네를 보고 사회를 보는 관점이 생긴 건 따로 공부를 하거나 활동에서 온 경험 때문인가?


나는 거시적인 사람이다. 미시적인 일은 잘 하지 않는데 2008년부터 자바르떼 대표를 하면서 지역에서 이러한 논의가 있어도 결합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교육이나 공연을 하고,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공부를 하다 보니 생의 주기가 보이고 삶의 문제가 보이게 된 것이다. 아이를 낳기 전에 총각일 때는 집에 안 들어가도 되니까 몰랐지만, 아이를 키우는 문제는 여러 사람과 협력해야 된다는 구조를 알게 된 거다. 아기는 혼자 키울 수도 있지만 사회가 키우는 것이다. 공동체가 키우지 않으면 문제가 된다. 그런데 지금은 탁아소에 맡기는 것조차 어려운 사회가 되었다. 예전에는 공동체가 아이를 키웠다. 하지만 지금은 핵가족이 되어서 못한다. 먹거리 문제도 마찬가지다. 의식주 문제가 대부분 그렇게 되어있다. “이건 나 혼자 깃발 든다고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구나.” 하면서 동네를 보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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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시민회관 쉼터에서 진행된 풍물대동굿 한마당



 


Q) 자바르떼 활동 중에 국악 종류 활동이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는?


인천자바르떼에 국악쪽 재원이 많은 건 그쪽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타악팀, 민요팀, 민중가요팀, 퓨전국악팀, 클래식 앙상블 등이 있는데, 나도 풍물을 했던 사람이고, 더늠이라는 풍물팀도 있다. 공연사업과 관련해서 이전에는 기금을 활용해 예술가들을 직원으로 두고 운영했지만 지금은 네트워크를 통해서 진행하고 있다. 찾아가는 문화공연 등을 한다. 문화단체만 운영해서는 직원을 많이 쓰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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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공간 두레박에서 열린 열우물 소소한 문화파티 사진



 


Q) 예술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 실력을 갈고 닦아서 대가가 되는 목표만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술에 대한 관심이 전문가 집단이 아닌 일반인의 생활예술로 관심이 이어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훌륭한 예술가를 길러내는 엘리트예술이 발달한 우리나라 풍토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공공성이라는 개념으로 치환해서 이야기하면 이해하기 쉽다. 문화예술의 가치는 소통하는 데에 있다. 내가 훌륭한 예술을 하더라도 누군가와 보고 소통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생활예술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것이다. 자바르떼 자체가 교육 중심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문화예술을 즐기는 측면을 중요하게 본 것이다. 훌륭한 예술가 한명이 세상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교육을 하면서 주민들의 생활 속 또는 소외계층의 문화예술 접근성을 강화하는 것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러한 방향으로 간 것이다.


지금은 이런게 보편화되었지만 처음 시작할 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문화예술의 선순환이라는 것은 착할 선(善)이 아니라 먼저 선(先)자의 의미가 있다. 대다수 시민, 주민, 국민, 노동자, 소외계층 모든 사람이 영위하는 동아리를 만들면 일상생활에서 느끼지 못하는 문화적인 가치 경험들을 하게 되고, 삶이 윤택해질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수준 높은 공연도 준비하긴 하지만 동네에서 재밌게 노는 형태가 된 거다. 대다수의 생활예술을 하는 그룹인 동아리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중요한 자양분이라고 보는 것이다.


 


Q) 열우물에서의 해프닝 또는 에피소드를 들려주신다면


재밌는 일도 많지만 갈등이 많다. 두레박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과 만나고 사람들이 문화예술을 구경하는 것, 또 마을에 정주하면서 보는 재미는 사는 사람만이 안다. 근데 같은 동네여도 나는 옆에 있는 아파트에 산다. 그러니 그냥 껄떡거리는 거지 얼마나 하겠나. 거창할수록 거짓말이다. 마을잔치 같은 경우에는 기획을 하는데 주민간의 갈등이 많아서 서로 등지고 원망하고 이런 것들이 많다. <은밀하게 위대하게>영화 촬영도 개인적으로는 반대했다. 조명을 하도 밝게 띄워서 밤에 잠을 잘 수가 없다. 제작사에 이야기해서 동네 상영도 하긴 했는데, 그러면 주민들은 기획사에 요구를 하기도 한다. 돈을 벌었으니 돈을 내놓으라는 식이다. 별 일이 다 있다.


 


Q) 동네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좋아지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 활동을 지속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것이 있다면.


장애 요인이 있다면 개발이다. 개발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만들고 뭔가를 해 나갈 수 있는데, 개발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렵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동네 상태가 심각하다. 일 년에 두 채씩 집이 무너지니까. 그런데 집주인은 외지에 사니까 고칠 필요가 없어 방치한다. 그런 집들은 무너지고 우범지역이 된다. 이젠 비행청소년들도 무서워서 못 올 정도가 되었다. 그런 것이 걸림돌이다. 사람은 지속이 불가능할 때 저항한다. 내가 이 동네에 살 수 있을까? 아이를 기를 수 있을까? 했을 때 막막하면 저항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노인밖에 남지 않으니 그럴 힘이 없게 되었다. 그러니 더 투자를 못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태원 경리단길 등을 가 봐도 거긴 동네를 없앨 수 없으니 공방도 세우고 건물에 투자도 하지만 여긴 그럴 수 없다. 사람들은 해님방이나 자바르떼 활동이 개발 반대를 위한 일이냐고 항의하기도 한다. 마지막 희망인 개발이 사라질까봐 붙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개발이 세입자인 그들의 희망은 될 수 없다. 집주인이 아니니 쫒겨날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게 어렵다. 하지만 동네에서 오래 살던 사람들은 무엇이든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우호적이다. 마을에는 그래도 아직 정이 남아있다.


 


 


Q) 올해 계획 또는 요즘의 관심은 무엇인가?


 


*지속 가능한 경제 영역을 만들어야 대자본의 영향 아래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나는 문화예술과 관련된 내용들을 어떻게 잘할수 있을까 고민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일정 수준의 커뮤니티 비즈니스, 지속가능한 비즈니스를 일정하게 해야 한다. 호혜와 연대 넘어 비즈니스를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지속 가능의 문제 때문이다. 사회적경제는 커뮤니티를 만날 수밖에 없다. 커뮤니티나 동네 갈등을 해결하는 문제는 사회적경제 영역에서 해결해나갈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는 협동조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본 경험이 많이 없다. 해결을 위해 공동의 손을 잡아본 경험이 없다는 말이다. 단절의 역사 때문이라고 보는데,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 전후를 두고 보면 길게 잡아도 1930년대 이후 이제 겨우 100년이 채 되지 않았다. 50년 주기로 큰 순배를 이제 두 번 돈 것이다. 우리 사회는 새로운 형태로 재편되고 있고, 새로운 세대인 20대는 우리와도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 친구들이 우리 사회에서 앞으로 할 일은 함께 손잡고 해 나갈 일들이다. 그런 경제구조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가 지금의 화두다. 각자가 가진 이익보다 공동으로 하는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대부분 손잡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손가락 하나 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부분들이 마을에 필요한 것이다.


또 하나는 동네 일이 있을 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주체적인 측면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주체형성을 하는 사람들이 자꾸 많아지는 일을 해야 하는데, 마을 주민으로서 활동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마을활동가를 만드는 일도 일정한 경제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서울 성미산을 주제로 한 영화 <춤추는 숲>을 보면 성미산 싸움을 했던 영화 주인공으로 나오는 사람이 前인천자바르떼 대표다. 서울시 마을공동체 지원센터가 생기기 이전부터 성미산에서 어떤 가치를 가지고 움직였는지 많이 봐왔고 공부도 많이 했다. 마을활동 주체와 더불어 그런 가치관을 서로 공유하는 네트워크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단순 연대 수준을 넘어서서 가치와 함께 엔터프라이즈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지속가능하고 대자본이 지배하는 것들에 대해 저항할 수 있다. 분야는 다양하다. 협동조합도 있겠고.


 


* 예술 이전에 '예술가 되기'부터


인천센터가 열우물에 가서 나완 다른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봤으면 한다. 동네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보면 동네 역사들이 더 보일 것이다. 주민운동 차원에서는 해님공부방과 만나는게 좋겠다. 문화의 경우는 좀 다르다. 예전에 인발연에서 하는 중요한 토론회가 있었는데, 문화 영역에서 지역공동체만들기 활동에 대한 것이었다. 문화예술가들이 보는 건 공공성·대중성·예술성인데 예술가들에게 ‘예술가 되기’의 측면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 반드시 주민되기를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일회성 사업으로 치고 빠지는건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그런 것들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앞으로는 정주하는 삶이 늘어나지 않을까?


주민운동가와 예술가가 소통할 때 간단한 사안에서는 스쳐가더라도, 역할을 논의하고 배치될 때 소통이 잘 안 된다. ‘커뮤니티 아트’라는 개념과 ‘커뮤니티 베이스드 아트’의 차이를 유창복 서울마을센터장이 단순히 정리를 잘 했는데, 전자는 예술가가 공동체에 들어와서 자기 행위를 하고 나가는 것이고, 후자는 공동체에 기반해서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예술이다. 요새는 이런 논의가 활발해서 공연예술가들도 지역에 거점을 잡고 그 안에서 흐르게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직 시작은 못했지만 자바르떼는 마을학교 또는 마을예술창작소 그런 부분들을 유심히 보는 중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새로운걸 시작하는게 제일 좋은 것이다. 옛날에 왜 두레를 만들었겠나. 부모가 살던 곳에서 나도 태어나 살며 꾸준히 생계를 유지하고, 세상을 보기도 하고 자녀를 낳는 이 시스템, 정주라는 개념이 무너진 것이다. 지금은 모두가 신도시로 간다. 의문이 하나 있다. 내 또래 친구들의 자녀들, 다음 세대는 계속 아파트에 살게 될까? 장성한 다음에도? 아마 베이비부머 세대가 낳았던 우리보다는 더 많이 재정착을 할 것이라 본다. 웬만하면 아파트에 살았다면 그 동네 살 확률이 높다. 우리사회가 이미 변했다. 아직 마을을 만든 경험이 없어서 그렇지 아마 그 친구들이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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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 이광민 (사업지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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