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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정책, 듣다
마을의 문화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공간의 장소화
서예지 (프리랜서)
나를 포함한 80, 90년 세대 대부분은 아파트 숲에서 자랐다. 그리고 도심의 도식화된 건물들 안에서 밥을 먹고, 영화나 책을 보고, 쇼핑 하고, 이따금 전시를 보는 것과 같이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 위에 놓여진 한정적인 문화생활을 즐긴다. 이러한 활동들은 개인의 울타리 안에서만 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난 관계는 맺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도시의 따분함과 인간관계의 삭막함을 느낀 청년들은 청년공동체를 만들거나 자신만의 삶의 목적을 찾기 위해 마을(또는 원도심)로 떠나고 있다.
나 또한 지속적으로 마을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싶은 청년이다. 그 이유 중 첫 번째는 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 때문이다. 마트가 아니라 텃밭에서 자라 햇빛만 고루 머금고 자란 상추와 가지, 오이를 즉석에서 따서 먹는 소소한 행복과 이웃과 나눠 먹는 즐거움이 있는 풍경. 이와 더불어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을의 문화나 시간이 축적되어 다시는 똑같이 만들어 낼 수 없는 마을의 건물들이 마을에는 있다. 오래된 간판의 폰트나 손 그림, 건물의 디자인과 벽돌의 색 같은 것들은 그대로 세월을 머금고 숨을 쉬고 있는 것만 같다.
두 번째는 지역의 활동가, 예술가들과 소통하며 나누는 유대감과 만나는 사람들의 넓은 스펙트럼 때문이다. 여러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축제를 만들고 주민과 마을을 찾는 외부인과 함께 소통하며 마을의 문화를 보존하고 또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동구 배다리 마을에 있는 날마다 주인이 바뀌는 ‘다괜찮아 요일가게’에서 수요집밥을 먹으러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여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 얘기를 하고 있다.
마을 주민이 초청한 골목길 삼겹살 파티가 한창이다.
이와 같은 활동을 하는 문화공간들은 마을에 남아있는 가치 있는 건물을 주로 활용하고 있지만 불안함도 함께 가지고 있다. 행정에서도 마을의 유무형적인 자원들을 활용하고 보존해 지역사회의 활기를 불어넣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중, 접근성이 가장 쉽고 직접 느낄 수 있는 것이 공간의 활용이다. 과거에는 열심히 제 할 일을 다 했던 건물들이지만 현재 제 역할을 잃고 방치된 곳들을 시(市)에서 사들여 그에 맞는 쓰임을 적절히 잘 운영해줄 지역의 주체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부수어 새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역을 연구하고 관심과 애정이 있는 예술가와 청년들에게 주어졌을 때, 그리고 이들이 공간 운영에 대한 금전적인 걱정이 없다면 최고의 생산적인 시스템이 된다. 실리콘 벨리의 많은 창업가들이 ‘차고’에서 시작했던 것처럼, 부담 없는 공간에서 망설였던 아이디어를 실제 구현하고 시도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게 될 것이다. 이러한 창의력을 지역사회발전을 위한 아이템과 연결할 수 있도록 행정에서 도우면 어떨까.
각 공간에서 재밌는 모의가 열리면 활동가나 청년들이 서로 만나 관계를 맺고 정보를 공유하며 새로움을 만들어내고 자연스레 공동체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면서 청년들의 지역 정주성을 높여주는 효과를 기대해볼 수도 있다. 사회 소외층이나 문화적 경험이 부족한 어르신 등 다양한 계층이 문화예술에 대한 접근을 높여주는 장소를 만들고, 여러 공간들이 서로 연계해 행사를 계획하고 모임을 갖는다면 시민들이 지역에 대한 애착심과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마을의 지속성이 길어질 것이다.
옛 건물을 유지보수 해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난 사례가 많지만, 최근 경험한 교토 여행에서의 사례를 들자면 “도시 전체가 관광지”라는 말답게 오래된 건축물과 현대적인 모습이 공존하고 세월의 기품이 느껴지는 곳들이 많았다. 그 중 “아트센터”하면 얼핏 떠오르는 세련된 건물이 아니라 옛 교실이 그대로 남아있는 초등학교를 사용하고 있는 “교토 아트센터”가 인상 깊었다.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이 초등학교는 93년 폐교 이후 방치되어 있다 주민들의 바람으로 85년이었던 건물의 수명과 역사를 연장하게 되었다. “교토 아트센터”는 다른 미술관에 비해 대중적인 눈높이로 예술을 마을로 끌어오고 있었고, 매해 마을 축제를 열며 여전히 운동장에선 운동회가 열리는 등 마을 주민들과 끊임없이 교류하고 있었다. 교토 시는 이곳이 지역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면 한다는 말과 함께 시민사회의 요구에 적극 협조했고, 현재 행정의 개입을 최소한으로만 하며 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예술가나 활동가들에게 공간을 맡기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도 행정에서 마을의 문화적 자원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지원 시스템을 갖춰 시민들과 소통과 협의를 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는 그런 눈을 갖기엔 먼 것 같다. 최근 중구에 100년 된 근대산업유산인 옛 비누 공장이었던 ‘애경사’의 허망한 철거가 있었다.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 조성이 철거의 이유였다. 모 방송사에서 촬영한 영상에는 80년대 신문조각이 벽면 틈에서 발견되고 벽돌이나 건물의 형태 등이 건물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가치가 높은 곳이라고 했다. 무엇이 먼저일까?
지금은 없어진 애경사 건물과 400년 된 폐업한 술집을 매입해 지역 커뮤니티 펍스를 만들어 마을의 순환경제 사례를 만든 영국의 것과는 대조적이다.
더욱이 이러한 행태에 뭇매를 맞았던 중구청은 반추의 여지는커녕 8부두에 있는 오래된 곡물창고도 부동산 개발을 위해 부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천시는 지금 ‘비’문화주권을 선언하고 있다. 지역을 찾는 관광객들은 그 지역만의 고유하고 특별한 문화적 가치를 보려고 방문한다. 일차적인 감정 밖에 느낄 수 없는 곳엔 다시 찾지 않는다. 지역을 찾는 이들이 집에 가서도 떠오르는 것들은 “우리가 돈으로 살 수 없는 세월의 역사”이다. 미래의 무궁무진한 보고(寶庫)가 될 여러 가치 있는 공간들을 단기적인 이익 앞에서 잃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