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 마을에서 민주적으로 살다 : 박상훈 대표
<정치의 발견에서 민주주의의 재발견까지>
“개인이 아무리 잘 산다 하더라도
공통된 조건이 나쁘면 좋은 삶이 가능한 여지는 점차 줄어든다.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면 내게 주어진 책무만이 아니라 반드시 공공의 것을 고려해야 한다.”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라는 말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좋은(선한) 삶에 대한 관심’이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정치의 근본적인 관심이 선한 삶, 행복한 삶, 보람 있는 삶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선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라고 하는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하다.
개인이 아무리 잘 산다고 해도 공통된 조건이 나쁘면 (지속적으로) 좋은 삶이 가능한 여지가 줄어든다. 내가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면 본인에게 주어진 책무 뿐 아니라 반드시 공통된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정치는 개개인의 시민성, 심성의 공통된 토대를 다룬다. ‘좋은 정치’가 ‘좋은 시민’을 만든다는 것이 정치의 출발이다.
정치는 삶의 모양을 결정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한 복지국가의 사례로 스웨덴 모델을 이야기한다. 스웨덴 사람들은 처음부터 타협, 협동의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복지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100년 전 스웨덴은 유럽에서 가장 못살고, 배우지 못하고, 술 먹는 문화만 있는 나라였다. 그러나 지금은 대한민국과 비교했을 때 (경제적 인구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음에도) 10배나 많은 대외원조를 하고 있다. 자신이 가진 일부를 내놓을 수 있는 ‘시민성’은 정치에서 비롯되었다. (낮엔 일하고 밤에는 정당활동을 하며 사회 안에 시민권력의 정치적 내용을 충분히 녹인 결과이다.) 정치로 인해 사람들 삶의 모양새도 변한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민성이 나빠지는 이유는 정치가 나쁜 것과 관련이 있다.
인간이 만든 사회 중에서 퇴직 후 가장 긴 보호를 받는 유럽사회에서 유럽 여성이 이상형으로 꼽는 남자에 대해서 조사했다.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1)키스 잘하는 남자, 2)유머 있는 남자(인생의 비극성과 싸울 수 있는), 3)요리 잘하는 남자, 4)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남자 순으로 나왔다. 같은 조사에서 한국은 재력과 외모가 우선된다. 놀랍지 않은가? 정치에 따라 사회의 모양이 달라지면 가장 사적인 영역인 사랑의 문제도 달라지는 것이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만날 가능성이 큰 사회와 아닌 사회는 개인의 행복 문제에 있어서 분명히 다르다.
정치를 생각하지 않고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생각할 수 없다. 나와 내 아이들이 살아갈 인생이 어떤 모양인지를 결정하는데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영역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없던 길을 여는’ 효과를 가진다
정치가 중요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정치화되지는 않는다. 행복은 사생활에 달려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선한 삶, 행복한 삶은 사적인 영역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정치에 참여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정치에 관심이 없다 해도 문제 삼기 어렵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비극이다. 모든 사람이 공적인 곳에 참여하고 공적인 기준을 부여받게 되면 개개인의 삶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모든 사람이 정치에 참여한 예도 ‘나치’와 ‘실패한 공산주의’ 뿐이었다.
아시다시피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의 민주정치 때 만든 업적은 놀라웠다. 모든 학문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이 나왔다.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기만 하면 (조금 시끄럽기는 하지만) 독창성, 창작 능력 등은 대단해진다. 그렇다면 아테네 시민 모두가 정치에 참여했을까? 당시에도 15% 안팤으로 참여했다. 그 사회 공동체에 대한 일을 일부가 잘 감당해 주면, 나머지는 사적인 이야기나 하면서 아고라에서 노는 것이 훨씬 즐겁고 행복한 것이다. 정치가 아니어도 인간의 삶을 살찌우는 일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정치적 기능이 사회적 기틀을 이룬 뒤에야 가능하다. 정치가 다져지지 않으면 나머지 모든 것에 문제가 생긴다.
법 없이도 사는 이타적인 사람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법 없이 유지될 수 있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은 사회 안에서만 개인으로서 존립이 가능하다. 그래서 법 없이 사는 사람의 삶은 법이 사회를 튼튼하게 잘 지탱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정치가 가지고 있는 선한 효과는 개개인의 모든 삶의 문제를 세세히 해결해주지는 못하지만, 한번 좋아지면 모든 사람에게 좋은 효과를 미친다는데 있다. 정부 예산의 일부만이라도 다르게 쓰인다면 결핍된 조건을 가진 많은 이들이 내일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 정치에는 ‘없던 길을 열어주는’ 효과가 있다.
민주주의는 다른 사람을 ‘통치’하고 나 스스로를 통치하는 ‘자치’를 알게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간사회는 전부 ‘똑똑하다는 소수의 사람이 만들어 낸 체제’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모든 위험한 결정이 거기서 다 일어났다. 오늘날 인류가 최선의 사회라고 여기는 민주주의 사회는 ‘가난한 보통 사람들도 힘을 합치면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를 뜻하는 ‘Democracy’에서 cracy의 어원은 ‘통치’이다. 따라서 민주정은 평범한 보통 사람에 기반을 둔 통치 질서, 즉 ‘다른 사람을 통치하고 나 스스로를 통치하는 자치를 알게 하는 것’이다.
정치의 본질은 권력이며, 통치에 있다. 이를 떠나서는 좋은 정치를 말할 수 없다. 우리 사회 권위주의가 오래 지속되다 보니 통치라는 말 자체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잘 생각해 보면 정말 중요한 말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목적 있는 삶을 산다고 했을 때, 남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홀로 착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이견 사이에서 협력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바로 통치이다.
그래서 통치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시민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권력, 통치는 정치에서 나온 말이고, 아주 아름다운 말이다. ‘Power’는 힘이지만 에너지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강력한 매력을 느낄 때에도 쓴다. 이 말이 보통 사람에게는 접근이 허용되지 않기에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우리 삶에 이 힘을 가져올 실력과 의지가 없으면 소수의 기득권이 계속 차지하게 된다. 대한민국이 많이 발전하긴 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사회는 전보다 훨씬 더 불평등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통치 근처에 다가오기 더 힘들어졌다.
정치는 본래부터 시민에게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정치가 사회에 역할을 다 하려면 행정, 신문, 경제, 지식인의 권력이 줄어들 때까지는 그 힘이 강해져야 한다. 그래서 정치가 그 사회에 역할을 다 하고 공익을 지키도록 길들여진 다음에는 정치가 가진 힘이 다시 시민에게 돌아가고 봉사직만 남아야 한다. 민주정치의 매력은 정치가 공익적인 역할을 하면 할수록 정치가 가진 폭력적, 억압적 양상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자살율이 높고,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대변되지 않는 것은 큰 문제이다. 정치가를 잘 뽑지 않으면 부분에서는 좋아질지 몰라도 사회의 퇴락을 막을 수 없다. 능력 있고 소명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정치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돕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는 거대한 시민의 예술이 될 때 딱 한번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