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1일, 제 1차 IFA(인천건축재단)포럼 ‘개항 각국거리 조성사업, 무엇이 문제인가’에 다녀왔습니다.
각국거리 조성사업은 “신포동 일대 골목상권을 개항 콘셉에 맞춰 유럽풍으로 꾸미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는데요. “외형적 개선을 통해서 관광 인프라를 넓혀 침체된 상권을 활성화시키겠다”는 취지로 중구청이 발표한 사업입니다.
그러나 지역의 역사·문화예술인들은 사업 진행 과정에서 민주적 절차가 지켜지지 않은 점, 역사적 사실과 다른 사업내용, 지역의 정체성과 상관이 없는 환경개선사업인 점을 들어 문제제기를 하게 되었고, 8/5일 중구청과의 간담회를 통해 각국거리라는 명칭 사용/서양식 건물 디자인을 적용하는 계획을 수정하기로 협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점에서 열린 포럼은 ‘지역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것’이 왜 중요한지, 근본적인 차원에서 도시재생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전환되어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자리였습니다.
첫 발제를 맡은 이승지 교수(인천가톨릭대학교 환경디자인학과)님은 지역 고유의 장소와 경관이 왜 중요하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공간’이 모여 있는 것을 ‘환경’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주어진 조건에 의해 조성된 것만을 의미하지만, 여기에 개개인의 체험과 의미가 담겼을 때 그 공간은 ‘장소’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도시를 바라보며 느끼는 ‘경관’은 바로 이 장소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교수님은 “내가 소속된 가족관계를 통해 우리 집과 남의 집을 구별하듯, 인간과 장소가 맺는 유대감(상호작용)이 장소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말씀하시며 장소의 본질이 내적 경험에 있고, 사람들이 장소에 의해 개인과 집단(공동체)에 대한 정체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이러한 장소의 특징을 무심하게 지워 버린 것을 ‘무장소’라고 부르는데, 무장소의 종류는 ‘지형과 문화를 반영한 다양성이 사라지고 획일적인 경관만 남은 곳’, ‘장소와 관련 없는 타인들이 와서 허상의 분위기를 즐기고 떠나는(디즈니 랜드) 가짜 장소’, ‘재개발로 인해 장소의 원형이 파괴되는 지역’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디즈니랜드처럼 의도적으로 장소의 차별성을 드러낸 ‘가공된 장소’는 (관광객의 지출을 목적으로)장소를 인위적으로 이미지화하여 고유성을 만든 곳으로, 이윤을 남길 수 있다고 판단되기만 하면 (심지어) 다른 장소의 정체성을 이식하는, ‘장소성이 상실된 무장소’이기 때문에 허구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소의 상품화를 위해서 도시가 가면을 쓴 것이라는 지적이었습니다.
거주민을 위한 장소가 아닌, 장소와 관련 없는 다수가 허상의 분위기만을 즐기고 떠나는 곳에서 얻게 되는 경험/감상은 피상적이고, 진실성이 결여되게 마련이겠지요. 교수님은 “도시 경쟁력은 지역의 고유한 경관에서 나타난다”며 지역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기본으로 하는 지역재생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도시의 ‘오래된 장소’는 고유 경관의 보고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며 만들어 낸 무수한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교수님은 사람들은 오래된 장소가 가진 (여러 시대를 거쳐 오며 중첩된)풍부한 내용과 모습으로부터 다양한 가르침을 습득하고, 문화를 향유할 기회를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발제는 ‘건축 없는 사회’라는 제목으로 전진삼(건축리포트 와이드 발행인) 건축평론가께서 발표하셨습니다. 주로 각국거리 조성사업 같은 발상이 있기까지 지역 리더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전개하셨습니다. “‘건축’은 세우고 쌓는 건물 만들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건물에 담아낼 수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함께 논의되어야 하는 것”인데, 건축에 대한 몰이해와 관광자원(이익)이 될 수 있다는 단순 논리가 과오를 범했다며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또 원도심 회복이라는 슬로건 아래 위장된 각국거리의 표정으로 지역민과 소통하려 한 것은 아닌지, 외지인을 끌어들일 좋은 요소이면 숭고함보다는 천박함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인지 물으셨는데요. 빨리 완성하려는 조급함, 전문가・지역의 문제에 앞장서서 참여하는 사람과 함께하지 않고 형식만 갖추어 진행한 점, 영구용역의 허구성, 지역 언론을 두려워하지 않는 점에 대해 비판하셨습니다.
이어서 “지역 정체성과 무관한 장소를 만들면 공동체가 허물어질 수 있다.”며 “모조된 것이 아니라 역사・문화・일상이 전제가 된 지역의 테마를 가지고 행정과 전문가가 함께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중구가 가진 건축 자원을 먼저 돌보고, 개발 이전에 안심하고 보행할 수 있는 환경을 먼저 갖추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발제 후에는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손장원 교수(인천재능대학교)님은 “이미 동화마을 사업, 대불호텔 복원사업이 비슷한 콘셉으로 진행/예정되었다”며 진정성 없는 사업, 자격 없는 자문위원을 비판하셨습니다. 또 “엄정하고 객관적인 역사적 잣대 없이 이루어지는 복원은 또 하나의 세트장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며 “시민의 세금으로 한번 지어진 건물은 다시 허물 수 없기 때문에 관광만을 앞세울 것이 아니라 삶과 역사성을 오래 고민하고 진행해야 껍데기에 불과한 짝퉁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토론자로 나선 이종복 대표(터진개 문화마당 황금가지)께서는 자신이 3대째 신포동에 살고 있음을 소개하며 주민의 눈으로 본 사업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의 소중한 삶이 담긴 장소에는 각종 추억과 현재의 지난한 삶이 배어있음에도 한 번에 뜯어 고치려는 폭력적인 개발 방식, 비민주적 구조로 주민동의를 얻어내 사업을 진행한 점, 지역과 근거 없는 사생아를 만드는 결정이 과연 필요한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셨습니다.
이어서 라운드 토크를 진행했습니다. 사업 자체가 가진 문제점과 진행 절차에 대한 문제제기 / 지역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공감대를 만드는 것 / 행정에서 나온 계획을 공유하고 함께 의견을 개진할 절차 및 주민과 전문가가 개입할 수 있는 기구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는데요. 지역사회의 여러 구성원들이 지속적으로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자는 데에 뜻을 같이하였습니다. 특히 행정에 대한 주민의 의존도를 낮추고 주민 스스로가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단순히 ‘지역을 활성화하는 것’을 넘어서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지향하고, 그래서 어떤 가치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장소를 만들 것인지에 대해 논의해 나가자고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구영민 대표((사)인천건축재단)는 “껍데기로 만족하는 시대는 지났다.”며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고민이 이어져야 하며 이는 집단지성의 형태로, 풀뿌리 형태의 지역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