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는 살아있는 학교
인천 마을n사람 ‘우리동네 문화복덕방-사람책’
한가위를 앞둔 구월의 어느 주말, 인천 동암역 북광장에서 593번 버스를 잡아탔다. 열우물(십정동)을 지나 가좌동으로 향하는 차로 변에는 갖은 플래카드들이 눈에 띄었다. 재개발을 알리고, 부동산의 가치를 높이자는 문구들이었다. 인천 서구 가좌동 일대는 2016년 개통 예정인 인천지하철 2호선 공사로 인해 재개발의 몸살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공사중’이라는 말이 실감된다. 누군가가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밥 무어헤드)고 한 표현이 떠오른다. 무엇이 우리 삶에서 진짜 인생을 사는 것인지를 묻고 있는 표현일 법하다. 어쩌면 그것은 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아니라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버스 차창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이윽고 버스가 가좌교회 앞 정류장에 멈춘다. 나의 상념도 잠시 멈춘다.
공간이 네트워크를 만든다
마을n사람(대표 권순정)이 2014년 가을부터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시민 문화예술교육 활동 지원사업 ‘시시콜콜’의 일환으로 두 해째 청소년인문학도서관 느루에서 진행하는 ‘우리동네 문화복덕방’은 우리 사는 동네가 부동산 가치가 아니라 복덕방(福德房)의 문화적 의미를 회복하자는 차원에서 수행하는 프로젝트이다. 지금은 죽은 말이 되어버린 ‘복덕방’이라는 말에 스며있는 인정(人情)과 온기의 의미를 동네에서 복원하자는 것이다. 마을n사람이 선택한 방법은 사람책 프로그램이다. 청소년인문학도서관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인 만큼 사람책 프로그램은 퍽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휴먼라이브러리(Human Library)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책 프로그램은 누구나 동네에서 일상에서 사람책을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 커뮤니티 활동이다. 청소년인문학도서관 느루를 오가는 가좌동 일대 청소년들도 사람책들과의 만남과 교류를 통해 자신의 진로 탐구를 적극 모색하고 있는 눈치였다. ‘느루’라는 말은 “한꺼번에 몰아치지 않고 길게 늘여서”라는 뜻을 지닌 우리말이다.
나는 청소년인문학도서관 ‘느루’라는 공간에 퍽 매료되었다. ‘느루’라는 공간이 탄생하는 과정이야말로 가좌동 일대 마을 사람들의 회복력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지난 2008년 무렵부터 가좌동 일대 청소년들을 위한 공간의 필요성을 절감한 동네 사람들이 오직 민간의 힘으로 십시일반의 마음으로 자금을 모아 2011년에 오픈한 곳이 바로 ‘느루’였던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도서관 하나 짓는데 ‘기적’ 운운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나 진짜 기적은 느루 탄생 과정이 실증하듯이, 행정이 주도하는 방식보다는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움직이려는 마음 자체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이 관점이야말로 “누구를 위한 마을인가?” 측면에서 더없이 중요한 공통의 문화적 경험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마을은 마을을 생각하는 이러한 마음들에서 비롯하는 것 아니겠는가.
느루에서 놀란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전적으로 주민들의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느루’라는 공간이 운영되는 방식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처음에는 어른들이 중심이 되어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다. “우리가 언제 그런 프로그램을 원했나요?” 권순정 도서관장은 “아이들의 그런 반응을 보고 난 후 아이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청소년 운영위원회를 꾸려 아이들에게 도서관 운영에 관한 권한을 대폭 이양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지금까지 5기째 운영되는 청소년 운영위원회는 어른들과 동등한 권리와 자격으로 도서관 운영에 관해 발언권을 갖고 함께 책임을 진다. ‘우리 공간은 우리가 디자인하고 책임진다’는 운영철학이 2011년 설립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발언권이 어른들에 의해 억압당하지 않고, 협력과 조화를 이루는 일상적 공론장이 탄생한 셈이다. 이러한 공론장의 힘은 느루에 대한 아이들의 전폭적인 신뢰와 참여에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느루도서관 곳곳에는 가정여중, 동인천여중, 가좌고를 비롯한 인근의 청소년들이 ‘느루’라는 공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엿볼 수 있는 표현들이 적지 않았다. 아무 제약 없이 편하게 오는 곳, 어른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공간, 놀 수 있는 공간, 제2의 집…… 같은 아이들의 표현들을 보라. 느루도서관을 제2의 집으로 생각하는 아이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우리는 우리 사는 동네가 삶터이고, 일터이며, 동시에 놀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저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마을은 관계라는 점을 외면하는 ‘배신’ 행위라고 감히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간이 네트워크를 만든다”는 점에 대해 더 자주 생각하고, 자신이 사는 동네에 이러한 공간을 실제로 더 많이 만들어야 마땅하다.
진로 탐색을 넘어, ‘래디컬 스페이스’로
이 점에서 마을n사람이 진행하는 ‘우리동네 문화복덕방’ 프로젝트의 경우 청소년들의 진로 탐색을 위주로 한 사람책 프로그램으로 짜여진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아이들 또한 동네에 사는 사람책들과의 만남과 교류를 통해 자신이 꿈꾸는 미래의 직업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리라. 2016년이면 중학생들의 자유학기제가 전면 시행되는 시점에서 마을이 학교가 되는 ‘마을-학교’의 가능성을 적극 모색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그동안 아이들이 만난 사람책 목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캘리그라피(고복순), 펜글씨(김영숙), 진로직업(권순정), 바리스타(서슬기), 영화책(라정민), 심야식당 등 아이들이 직접 만난 사람책의 목록은 다양하다. 진로 탐색을 원하는 청소년들의 의견을 십분 청취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동네 청소년들의 진로 탐색 위주로 진행되는 사람책 프로그램에 대한 더 깊은 고민과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청소년들이 진로 탐색을 위해 ‘읽어볼 만한’ 사람책 위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실용적 기능에 치우친 사람책 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물론 이러한 사람책 또한 필요하다. 문제는 그런 방식은 사람책 프로그램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더 고려해보아야 한다. 덴마크 사회운동가 로니 에버겔이 제안한 사람책 프로그램은 “오해는 무지에서 비롯되고, 이해는 알아가는 과정에서 시작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사람책 프로그램이 차별, 편견, 소수자, 차이,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생각하는 시작점으로서 의미를 지녀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 청소년들의 진로 탐색을 위한 ‘실용적’ 목적 외에도, 나와 당신의 편견을 바꾸고 동네를 바꾸려는 사회적 ‘운동성’ 측면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동네 사는 장애인을 비롯해 우수마발의 다양한 사람들의 ‘다름’을 아우르는 공동체는 그런 낯선 존재들과의 ‘마주침’ 과정에서 더 구체적으로 구현된다. 영화 <킹스맨(Kingsman)>(2015)을 주제로 한 영화 토론회에 참여한 신우정 학생(가좌고 3)이 제기한 정당한 의문 또한 그런 문제의식의 소산일 것이다. 우리 사는 동네가 영화 <킹스맨>의 경우처럼 서로가 서로를 함부로 죽이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 나 또한 <킹스맨>을 보는 내내 소위 ‘개 같은 마을’을 의미하는 영화 <도그빌(Dogville)>(2003)을 연상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당신이 사는 마을은 생태계적으로 건강한가. 인천 가좌4동의 경우 청소년인문학도서관 느루가 있고, 마을n사람이 진행하는 사람책 프로그램이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생태적으로 건강한 편이라고 말할 수 있을 법하다. 이것이 동네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마을n사람이 ‘조금 더’ 동네의 다양한 사람들을 포괄하고, 동네 사람들을 연결하려는 활동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마을n사람의 시시콜콜한 활동이 내 아이주의(主義)에 갇히지 않으며, 사람들의 다양성을 더 생각하게 하고, 마을살이의 기초체력을 기르는 살아 있는 학교로서 제 역할을 다하기를 희망한다. 나는 그런 공간을 일러 풀뿌리 공간을 의미하는 ‘래디컬 스페이스(radical space, 마거릿 콘)’라고 자신 있게 부를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민 문화예술교육 활동 지원사업 ‘시시콜콜’은시간(時)과 장소(市)에 구애받지 않는 교류(call)와 협업(collaboration)을 이름 속에 담고 있다. 문화예술이 특별한 남의 것이 아닌, 시시콜콜한 우리의 일상에서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또한 일방향으로 전달되는 교육서비스가 아니라 공유와 소통, 상호 학습의 과정으로 문화예술 활동이 이루어지는 시민 문화예술교육을 지향한다. 2014년부터 새롭게 바뀐 이름으로 운영된 ‘시시콜콜’은 전문 문화예술교육 단체가 아니더라도 시민 문화예술교육의 가치와 지향점에 공감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린 공모로 문턱을 낮추었다. 학교, 복지기관, 특수기관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예술교육 지원을 넘어,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문화예술교육 환경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시민들이 일상에서 직면하는 삶의 문제를 자발적이고 지속적인 문화예술교육 활동으로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지원한다. 마을n사람은인천 가좌 지역에 자생적인 문화예술활동의 기반을 형성하고, 주민들 간의 관계성을 회복하기 위해 마을주민과 청(소)년이 배움과 놀이를 실천할 수 있는 푸른샘 어린이도서관과 청소년인문학도서관 느루를 만들었다. 2012년과 2013년에는 장고개 프로젝트를 통해 동네 동아리들을 활성화시키는 활동을 했고, 2014년부터 2015년까지 2년차 ‘시시콜콜’ 지원을 받으며 ‘우리동네문화복덕방-사람책’을 운영해왔다. 그중 라정민 청년활동가가 진행하는 ‘영화 사람책’은 격주 토요일에 진행되며, 평균 4~6명의 청소년이 모여 영화를 감상하고 함께 토론하는 모임이다.
사진 제공 _ 마을n사람
고영직
문학평론가. 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겨레신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gohyj@hanmail.net
2015년 10월 5일
출처 :http://www.arte365.kr/?p=45729 [아르떼365]